[신경숙 연재소설-1] 푸른 눈물

[신경숙 연재소설-6] 푸른 눈물

아기 달맞이 2012. 10. 6. 06:44

 

  • 1. 두 사람
    • 그림=김동성
    • 때로 어떤 다정한 말은 땅에 묻힌 씨앗처럼 사랑을 품게 만든다.

       

    • 산골의 객관에서 궁중 무희였던 리진은 불란서 공사 콜랭으로부터 나의 천사여, 라는 말을 들었다. 불어가 아닌 분명한 조선어였다. 리진은 나의 천사, 라는 말보다 콜랭이 조선어를 어색하지 않게 발음한 것에 놀랐다. 콜랭은 틈틈이 조선어를 익혔지만 그가 발음하는 조선어는 늘 뭔가가 부족한 채 허공으로 흩어졌다.

      리진은 어린 시절, 성균관 옆 반촌마을로 선교를 나온 블랑(Blanc) 선교사로부터 불어를 처음 들었다. 곧잘 불어를 따라하는 어린 그녀에게 블랑은 틈틈이 가르쳤으므로 불어가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리진은 무슨 심리에서인지 콜랭 앞에서 자신이 불어에 친숙하다는 표를 내지 않았다. 콜랭은 일주일에 두 번은 일정한 시간에 그녀와 불어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랬어도 두 사람은 깊은 이야기를 나누려면 통역을 불러야 했다.

       

    • 바다 건너 그의 나라로 간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씨를 쓰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뜻이었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마음에 가장 불안한 것이 그것이었다. 리진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불안한 마음을 짐작했던 것일까. 콜랭은 그녀의 나라 조선의 산골 객관에서 나의 천사여, 라고 처음으로 완벽한 발음의 조선어를 썼다.

      그의 입에서 조선어가 부드럽게 흘러나왔을 때 그녀는 언어가 감정을 변화시키는 순간을 경험을 했다. 리진, 이라는 발음도 아직 어색한 콜랭으로부터 1%도 부족하지 않는 조선어 발음을 듣게 된 순간 그녀의 담담하던 마음이 격렬해졌던 것이다. 온종일 가마에 흔들린 피로가 물에 쓸리듯 밀려가고 따스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을 때처럼 그리운 감정이 리진의 가슴속으로 밀려왔다. 콜랭을 처음 만난 날부터 여태 콜랭이 자신과 함께 있고 싶어할수록 한 걸음 물러서는, 알 수 없는 마음이 되었던 거리감도 사라졌다.

       

    • 그녀는 목덜미 위로 흑운처럼 쌓아올린 검은 머리를 풀어 내리고 콜랭 앞으로 브러시를 내밀었다.

      ―페녜 무아(Peignez-moi:빗어줘요)

       

    • 콜랭의 눈이 커졌다.

      남자는 여자의 검은 머리를 빗어주는 걸 좋아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맨 처음 선물한 것도 그의 나라에서 가져온 브러시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여자는 누가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궁중의 생각시 시절 어린 동무들이 서로 머리를 빗어주고 두 가닥으로 땋은 뒤 다시 말아 올려 자주색 댕기를 달아주며 웃음을 터뜨릴 때도 여자는 저만치 혼자 떨어져 생각시들이 하고 다니던 실버들 머리를 만드느라 애를 먹던 그녀였다. 그랬으므로 사랑하는 여자의 머리를 빗어주고 싶을 때의 남자는 그녀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표정이 되곤 했다. 그런데 여자가 스스로 머리를 풀고 남자 앞으로 브러시를 내준 것이다.

       

    • 콜랭은 리진이 내민 브러시를 받아 들고 그녀 뒤로 가 앉았다. 그녀가 머리를 빗겨달라는 말을 불어로 할 줄을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콜랭은 그녀의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에 잠깐 얼굴을 묻었다. 콜랭의 얼굴엔 웃음기가 어렸다. 콜랭이 리진, 이라고 어색하게 발음할 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그녀가 애써 참고 있을 때의 표정과 같았다. 콜랭은 얼굴을 들고 그녀의 검은 머리를 빗어 내리다가 장난기가 동했다. 콜랭은 빗질을 멈추고 “페녜 무아(빗어줘요)?” 리진의 목소리 흉내를 내며 그녀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 그녀가 그를 향해 돌아앉자 풍성한 검은 머리가 물결처럼 출렁였다.

      리진은 브러시를 든 채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의 턱수염이 그녀의 뜨거워진 뺨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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