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김동성
- 1. 두 사람
인생이든 상황이든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오히려 변화가 찾아온다. 물로 둘러싸여 있던 작은 어촌마을은 조약 이후 급속히 개항장으로 변모했다. 일본 조계(租界)가 들어서는 것을 시작으로 청국을 비롯한 각국의 조계도 뒤따라 설치되어 1891년 무렵의 제물포에는 열 사람 중 한 사람은 일본인이거나 중국인이었다. 그들이 제물포에 슬픔을 불어넣을지 생명력을 불어넣을지는 알 수 없었다.
도성에서 이 항구까지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기도 하고 흙먼지가 이는 신작로를 지나기도 했으며 몇 척의 목선이 떠 있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자갈길을 지났고 이제 막 새로 심은 푸릇한 벼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논두렁을 지나오기도 했다. 붉나무와 버찌나무 느릅나무를 지났고 금잔화와 꽃창포와 민들레와 불두화를 지났다. 야생 모란을 만나 그 앞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그녀는 가마 바깥의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 두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리진(李眞)은 끝없이 펼쳐지는 잿빛 개펄 또한 처음 보았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바람 또한 조용했다. 눈을 들면 푸른 바닷물 멀리 올망졸망한 섬들이 불안한 조선의 앞날은 모르는 듯 꿈처럼 떠 있었다. 땔감을 비롯한 다양한 화물을 실은 배들이 누가 밀었다 당겼다 하듯이 바다 위에서 잔잔하게 출렁거리고 건어물 하치장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항구를 뒤덮고 있기도 했다. 갓 잡아 올린 생선을 좌판에 내놓고 있는 사람과 지게 가득 짚신을 지고 바쁘게 걸어가는 짚신장수를 비롯해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활기가 넘쳐흐르는 풍경 위로 아직 더위가 묻어 있지 않은 투명한 초여름의 온화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배가 출항하기에 좋은 날씨라고 생각하다가 리진은 얼른 생각을 거두었다.
조선을 떠나는 콜랭을 배웅하러 나온 도호부사(都護府使)는 배를 타면서는 날씨가 좋다, 라는 말을 하지 않는 법이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당장 날씨가 좋다고 말하는 것은 항해 도중 비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면서.
배웅 나온 사람들 속에는 불란서에서 온 선교사들의 모습도 두엇 섞여 있었고 해관(海關)의 관리도 보였다. 불란서에서 건너와 조선에서 살고 있는 수녀들도 보였다. 사방으로 휘둘러보아도 높이 솟아 있는 건물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아서인지 항구는 외항인데도 얼핏 정박항처럼 보였다. 큰 선박이 눈에 띄지 않아서일 것이다. 가까운 곳의 파도도 먼 곳의 파도도 잔잔했다. 낮은 지붕들 사이로 이따금 하얀색의 유럽식 건축물들이 섞여 있으나 나지막하였다. 높은 건물이 없으니 짚으로 엮은 지붕을 가진 초가들은 나란나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 사이로 햇살이 따스하게 스며들었다. 깊은 궁궐에서 거북 자수를 놓고 춤을 추며 지냈던 그녀는 항구에 퍼져 있는 온화한 햇살을 보며 궁궐의 높은 처마들은 서로 닿을 듯 잇대어져 있어 고개를 숙이면 궁은 늘 그늘이었다, 는 생각을 했다.
배는 이제 출발하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흘 전부터 여행 중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처음 보는 것들, 처음 밟아 보는 땅,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곧 헤어졌다.
그곳은 어디였을까?
도성을 떠난 날 그들 일행은 지방의 객관에서 묵었다. 고사목으로 울타리를 쳐 놓은 산골의 객관에서는 조랑말을 열두어 마리나 기르고 있었다. 조랑말들은 푸우, 숨을 내쉬며 초원을 내달리고 싶어하는 듯했으나 당장은 울안에 갇혀 있었다. 밤이 되었을 때 창이 없는 방안으로 산짐승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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