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사람
세상의 물이 모두 바다로 밀려들어온다 해도 바다는 넘치는 법이 없다.
리진은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빌라호의 타원형 갑판으로 걸어 나왔다. 목철선인 빌라호는 선체가 넓고 흘수가 깊어 화물을 충분히 실을 수 있는 배였다. 빌라호는 700톤이 넘는 무게를 밤바다에 띄우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배를 처음 보고 놀라워하자 콜랭은 배의 선장자리에는 대통령도 앉지 못한다고 얘기해주었다.
왕도 앉지 못할까?
리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을 먼 이국의 땅으로 데리고 갈 배를 쳐다보았다. 심심한 사람이 한 생애를 바쳐 만들어 놓은 대형 장난감 같기도 하고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괴물 같기도 했다. 콜랭은 선원들은 배 안에서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휘파람을 불면 먼 대양으로부터 큰 바람이 몰려와 배를 뒤집어 놓는다고 믿는다면서.
기관실에서 들려오는 둔중한 기계음이 뱃전에 부딪는 파도소리에 섞였다. 배 앞머리와 대형 돛을 휘감아온 바닷바람이 그녀의 옷자락을 휘감았다. 바람에 밀리지 않겠다는 듯 그녀는 외투를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다리가 휘청거릴수록 반듯하게 서 보려 했다.
밤바다엔 검푸른 파도가 큰 소리를 내며 밀려 들었다가 배에 부딪혀 다시 밀려갔다.
밀려와라, 검푸른 바다여.
리진은 갑판에 서서 몸을 바다 쪽으로 내밀어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망망대해의 검은 물결 위 하늘엔 둥글게 차오른 달이 떠 있다. 사방으로 바닷물과 둥근 달뿐이다. 그녀는 흰 얼음 덩어리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은 파도의 포말을 이슥히 바라보았다. 좌우에서 수백 마리의 흰 말들이 폭풍처럼 달려왔다가 허공으로 치솟아오르는 형상으로 파도는 세차게 밀려왔다가 부서졌다.
어느 순간 거친 바람이 밤바다를 깊이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외투를 벗겨 버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검푸른 바다 위로 펄럭이며 날아가는 외투를 붙잡으려고 두 팔을 휘저었으나 곧 팔을 거두었다. 갑판 위에 그녀를 남겨두고 외투는 밤바다 위를 자유롭게 펄럭거렸다. 바닷바람을 따라 위로 치솟았다가 바닷물에 닿을 듯하다가 다시 펄럭이며 멀어지더니 한참 후엔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외투가 사라진 바다 위를 응시하다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 그림=김동성
- 외교관인 그가 해마다 두 달 가량을 배를 타고 다녔다면 궁중 무희(舞姬)였던 그녀는 오늘 처음 배에 올랐다.
발목길이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판탈롱에 길이가 짧은 조끼 차림, 그 위에 벨트를 묶게 되어 있는 여행용 외투를 입고 있는 얼굴이 희고 키가 크고 콧수염이 달린 불란서 남자와, 바람이 불면 덧입을 외투와 장미자수가 새겨진 곡선의 모자를 손에 들고 물결치는 듯한 연푸른 드레스 차림의 조선여자는 항구의 인파 속에서도 누구에게나 쉽게 눈에 띄었다.
장죽을 문 노인도, 나막신 장수도, 무뢰배로 보이는 젊은 사내도, 땟국 흐르는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외국인 조차(租借) 지역에서 차를 팔거나 뗏목 위에 땔감을 싣고 온 중국인, 부두에서 조선 소년에게 팥죽을 사먹고 있던 일본인도 두 사람을 보면 고개를 들었다. 낯선 세계의 문을 열고 안을 기웃거릴 때처럼 두 사람을 무안할 정도로 바라보았다.
특히 여자.
윤기 흐르고 숱이 많은 검은 머리카락을 빗질해 겹겹의 층을 지어 머리 꼭대기에 흑단처럼 올려놓은 맑은 얼굴빛에 검푸른 구슬처럼 깊은 눈을 가진 여자.
누구나 양식 머리를 하고 다니는 때가 아니었으니 그녀는 특히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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