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김동성
- 1. 두 사람
모든 이름 속에는 그 이름을 가진 존재의 성품이 숨어 살고 있다.
콜랭이 그녀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불러주길 원할수록 리진(李眞)이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이유는 콜랭이라고 부르고 나면 자신이 모르는 그의 모습이 튀어나와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이 바꿔놓고 말 것 같아서였다. 리진은 콜랭이 자신을 향해 리진, 이라고 부를 때마다 웃음을 참아내며 바로 곁에 서 있는 콜랭도 눈치 채지 못하게 스스로 리진…이라고 나직이 웅얼거려 보곤 했다. 콜랭의 목소리에 어색하게 실려 나오는 리진, 이라는 이름은 그 이름의 주인인 그녀에게조차 아직 실감이 없었다.
―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영혼을 가졌는지 상상도 못할 거요. 이 땅에서도 당신은 아름다웠으나 바다 건너 나의 나라로 가면 당신은 자유인이 되는 것이오. 당신의 재능과 아름다움에 내 나라 사람들도 깊이 반할 것이오.
―본국에 도착하면 난 당신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릴 것이오.
잠들기 전 남자는 리진을 깊이 끌어안으며 결혼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그녀는 한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궁녀에게 관례는 혼례와 다름없었고 그녀는 이미 궁에서 관례를 치른 몸이었다. 고모 서 상궁이 마련해준, 가슴과 등에 두 마리의 봉황이 수놓인 녹 원삼(圓衫)을 입었던 날, 방 동무 소아는 초록 공단의 향낭(香囊)이 담긴, 딸기 술이 매달린 연봉 매듭의 향갑 노리개를 원삼에 달아주었다. 정성을 들인 어여머리 위에 화관을 쓰고 예를 올렸다. 화전을 만들어 윗전에 올리고 생치(生雉)전에서 산꿩을 구해 방 동무들에게 음식 대접을 했다. 그렇게 관례를 치렀으니 그녀는 엄밀히 말해 왕의 여자여야 했다. 그러나 왕은 그녀를 그에게 보냈다.
―약속하오.
콜랭이 그녀의 가는 허리에 팔을 감아오며 결혼을 약속한다고 했을 때 리진은 마음이 아득해졌다.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들었다. 남자가 본국, 이라고 하는 남자의 나라를 떠올려 보려고도 했으나 허사였다. 겨우 생각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나라 대통령의 이름이 사디 카르노(Sadi Carnot)라는 것이었다. 그가 카르노 왕이라 하지 않고 카르노 대통령이라고 해 기억해 둔 이름이었다. 왕이 아닌 대통령이 존재하는 그의 나라는 이 바다 끝 어디에 있는 걸까. 바닷길을 두 달이나 가야 도착한다는 남자의 나라 거리에는 무엇이 있을 것이며 산하는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신발을 신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새삼스럽게 밀려드는 앞날에 대한 기대와 불안으로 인해 그녀는 남자의 이마에서 손을 거두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선실 침상맡에 걸어놓은 모란도를 바라보았다. 때로 헤어진 사람들이 남겨준 흔적들은 산만해진 마음을 달래주기도 하는 법이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도 모란은 근심 없이 화사하다. 그 아래엔 백자 항아리와 푸른 난이 심어진 화분이 놓여있다. 배가 제물포항을 출발한 뒤 선실에 들어온 그녀가 맨 먼저 침상 머리맡에 모란도를 걸어놓는 걸 보고 그가 선실 바깥으로 나갔다. 다시 돌아온 콜랭의 손에 저 백자 항아리가 들려 있었다. 콜랭이 조선에 있을 때 수집한 것으로 도성을 출발할 때 귀중하게 챙긴 것들 중 하나였다. 모란도 밑에 백자 항아리가 놓이자 황량했던 선실은 곧 조선의 방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저 안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흙과 꽃씨들이 들어있는 상자는 감색 베 보자기로 튼튼히 여며져 있고 그보다 더 단단히 매듭지어진 무명 베 보자기가 그 곁에 놓여 있다. 참으로 단단히도 여며놓았다. 저걸 묶은 사람도 쉽게 풀어보지 못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묶었을 것이다. 리진은 안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명 베 보자기를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그녀는 콜랭이 잠 깰까 봐 살짝 몸을 일으켰다. 드레스 위에 덧입던 원통형의 얇은 외투를 잠옷 위에 덧입고 살그머니 선실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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