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사람
- 그림=김동성
- 운명보다 깊은 이 사랑은 두 사람을 긴 여행 길에 오르게 했다.
몸이 출렁거리는 것 같아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혼곤한 꿈에 짓눌려 그녀의 이마와 풀어 내린 검은 머리에 땀이 촉촉이 배어 있다. 여기가 어디일까? 꿈속에 끝없이 펼쳐지던 배 밭을 헤매다 깨어난 그녀는 지금 자신이 바다 위에 떠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눈을 떴어도 꿈속처럼 흰 배꽃이 눈앞으로 쏟아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 그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손가락에 끼여있던 백통(白銅) 가락지가 얼굴에 쓸리자 손등을 펴고 지환(指環)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앳된 얼굴에 우수가 어렸다.
그녀는 침상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잠들었으니 분명 처음은 아닐 텐데 주변이 아주 낯설다.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었던 조선 해협의 거친 물살을 떠나 대양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빌라(Villas)호의 선창으로 스며들어온 달빛이 주변을 어슴푸레하게 밝히고 있다. 침상 맞은편 벽에는 로만 칼라 아래로 둥근 모양의 금색 단추들이 달린 그의 외교관복이 옷걸이에 바르게 걸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삼 센티 가량의 풍성한 금색 술이 가슴과 팔 소매 부분에 장식으로 반짝이는 견장들과 함께 붙어 있다. 그는 배 안에서 입지도 않을 거면서 관복을 따로 챙기더니 저기에 걸었다. 공사관에서도 그는 관복을 입지 않을 때에는 잘 보이는 곳에 늘 저렇게 바르게 걸어놓곤 했다.
그녀가 입었던 드레스가 외교관 복 곁에 나란히 걸려 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꿈에 쫓겨 잠을 깬 곳이 빌라호의 선실이라는 걸 감지했다. 부두 사람들의 시선을 단박에 끌었던 그녀의 아르 누보(Art Nouveau) 스타일의 연푸른 드레스 곁 또 다른 옷걸이엔 검은색 울 질감의, 엉덩이 근처까지 내려오는 양복 상의, 작은 깃이 달린 줄무늬 조끼, 폭이 약간 좁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여행용 외투가 옷걸이에 겹쳐 걸려 있다. 그 곁엔 길이는 높으나 챙은 좁은 그의 검은 모자와, 손으로 장미 자수를 놓아 만든 드레스와, 그것과 같은 빛깔의 그녀의 모자가 나란히 걸려 있다.
그는 어젯밤의, 아니 그의 나라의 외무부 장관 알렉상드르 르보(Alexandre Rebot)로부터 다시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은 날로부터 있어온 송별 연회에서 자주 마신 술 때문에 피로했는지 낯선 선실에서의 첫 밤인데도 곤히 잠들어 있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그녀에게 셀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을 맹세하고 싶어하는 그의 이마를 가만히 쓸어보았다. 낮에 눈을 뜨고 있을 때의 그는 신중하고 때로 단호해 보이는데 밤에 잠들어 있는 그는 아무 경계심 없는 순한 짐승 같다.
바다 위에서의 첫 밤, 그는 잠이 들기 전에 그녀에게 또 무엇인가를 약속하려고 했다.
―리진(李眞).
어둠이 내리면서부터 바다는 푸른빛 대신 검은 빛깔이 되어갔다. 처음 보는 바다를 깊이 응시하고 있는 그녀를 그가 리진! 하고 불렀을 때 그녀는 깜박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그가 그녀를 리진이라 부를 때마다 그의 목은 빳빳해졌다. 아직 리진이라는 이름 앞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에서 쉽게 감지되곤 했다. 매번 웃음이 밀려나왔으나 그녀는 간신히 웃음을 참아냈다. 당장 웃어버리고 나면 그가 다시는 자신을 향해 리진이라고 부르지 못할 것 같았으므로.
―콜랭….
1891년. 조선의 여인으로는 처음으로 불란서로 가는 배에 타고 있는 그녀는 바다 위에 떠 있다는 두려움을 물리치려고 잠들어 있는 남자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았다.
콜랭 빅토르 오귀스트 드 플랑시(Collin Victor Auguste de Plancy).
이 낯선 이름이 지금 그녀가 이마를 쓸어 내리며 나지막이 불러보고 있는 남자의 이름이었다. 이제는 떠나온 땅 조선에서 남자는 그녀에게 그의 긴 이름을 수도 없이 가르쳐 주고 그녀가 불러보기를 원했으나 그녀는 남자의 이름을 단 한번도 불러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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