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님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칠순 소녀’ 박완서

아기 달맞이 2012. 10. 6. 05:24

10월의 주제 시간의 지혜, 세월의 위안  아침 저녁으로 차가워진 공기에 옷깃이 절로 여며지는 시기입니다.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함께하는 ‘이 달의 책’ 10월 주제는 ‘시간의 지혜, 세월의 위안’입니다. 벌써 올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이 다가왔다는 뜻이겠죠. 얼마나 다행입니까. 시간은 우리에게 경험과 성찰의 기회를 선물합니다. 삶의 지혜를 온축한 신간 과 함께 올 가을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예쁜 것
박완서 지음, 마음산책
287쪽, 1만 2000원


이 책에 묶인 글이 박완서(1931~2011)의 가장 뛰어난 산문이라고 단언할 순 없을 것이다. 작가에겐 그의 소설만큼이나 유명한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가 있고, 발로 걷고 마음으로 적은 기행문 『잃어버린 여행가방』, 노년의 혜안과 통찰을 보여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이 있어서다.

 그럼에도 『세상에 예쁜 것』을 놓칠 수 없는 이유는 작가에 대한 적막한 그리움 때문이다. 다시는 그의 이름이 박힌 신간을 손에 쥘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책은 소박한 선물처럼 우리에게 왔다.

 그의 딸인 호원숙씨는 어머니가 노년을 보냈던 경기 구리시 아치울 집에서 한 묶음의 글을 발견했다.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했지만 책에는 담지 않았던 것이다. 호씨는 『못 가본 길이…』 출간 이후 어머니가 썼던 산문 두 편과 함께 2000년 이후에 발표한 글을 선별했다. 작가 지망생인 초등학생에게 보내는 편지, 문학강연 대담록, 김수환 추기경·박경리 작가 등을 기리며 쓴 추모의 글,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쓴 강연록 등을 한 데 모아 소품집처럼 펴냈다.

[일러스트=강일구]
 우선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가 ‘젊음’을 논하는 부분이다. 그는 ‘젊다는 건 체력이나 용모가 아니라 좋은 것을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과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고 옳지 못한 일에 분노하고 부조리에 고뇌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28쪽)’이라고 썼다.

 박완서는 ‘원로’라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는 작가였다. 그의 빛나는 작품 중 대부분은 노년에 쓰였기 때문이다. 그는 글쓰기로 정신의 탄력을 유지했고, 그래서 평생 청춘이었다. 70대에 써내려간 이 책엔 완고한 노인의 아집이나 세상에 찌든 편견, 이해가 결여된 훈계는 없다. 대신 여전히 새롭고 두려운 세상이 그의 앞에 놓여있을 뿐이다.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도 유별나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목은 ‘교육열이 유별난 어머니 때문에 초등학교부터 서울서 유학을 했다’는 내용이다. 개성의 한 시골에서 자란 그는 선생님이 되길 바라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또래 여자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책을 읽었다. 작가적 소질도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

 그는 “어머니는 당시 문학애호가였는데, 어머니에 대한 따뜻하고 좋은 추억 중에 하나는 (중략) 동네의 새색시들이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오는 광경입니다.(49쪽)”라고 했다.

 기실 작가의 소설은 이 시대의 어머니를 이해하는 해설서이기도 했다. 그것은 작가의 문학적 뿌리가 어머니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터다.

 먼저 떠난 지인에게 쓴 추모 글에는 유독 오래 눈길이 머문다. 타인의 죽음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고 김상옥 시인을 기리면서는 이렇게 썼다. “내 힘으로 이룩한 업적이나 소유는 저 세상에 가져갈 수 없지만 사랑의 기억만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아진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산문에선 타계한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에 자신을 비추어본다. 자신의 글이 사기성이나 군더더기, 동어반복은 없었는지 돌아보고 있는것이다. 작가 또한 죽음 앞에선 외로운 단독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를 꿋꿋하게 예비하려는 모습에서 대가의 의연함을 느낄 수 있다.

 
 다 읽고 나면 저자가 그리워져 그의 전작을 새로 읽게 만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