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님

박완서 그리고 엄마의물건

아기 달맞이 2012. 6. 19. 23:13

박완서 선생의 1주기 추모 전시 ‘엄마의 말뚝-박완서 1주기전’이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열리고 있다(6월 30일까지). 박완서 선생이 떠나고 선생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추모의 정이 모여 만든 전시회다. 작가의 물건 200여 점이 사람들을 맞는다. 가족사를 많이 다룬 작가인 만큼 가족과 관련이 깊은 물건도 등장한다. 어머니와 오빠, 가슴에 먼저 묻은 아들의 사진이 처음 공개되고 1953년, 결혼식날 찍은 흑백 영상과 새색시 때 시어머니 곁에서 수줍은 모습으로 찍은 사진도 있다. 생전에 버리는 것을 좋아하셨다는 선생이지만, 가족과 관련된 물건은 소소한 것까지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물건 중 유독 기억에 남는 물건에 대해 박완서 선생의 큰딸 호원숙 작가가 글을 보내왔다. 담담히 써내려간 듯하지만 곳곳에서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묻어났다.


1. 엄마의 애장품
정이 깊은 막냇동생 원균이가 선물한, 손수 퀼트로 만든 모자는 여행 중에 꼭 챙기셨다. 엄마와 같이 여행했던 사람들은 그 모자를 기억한다. “막내딸이 만들어준 거랍니다” 하며 쓰셨을 엄마의 목소리가 기억에 새롭다. 그리고 모자와 세트로 만든 퀼트 가방은 가벼운 동네 산책에 즐겨 드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그 가방 안에는 손수건과 함께 봉투 안에 분꽃씨가 들어 있었다. 아마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꽃씨를 받은 것이리라.

2. 『엄마의 말뚝』서두(1982)
『엄마의 말뚝』첫 구절의 육필 원고는 나중에 쓰신 것이다. 아마 작가의 육필 자료를 위해 쓰게 한 것으로 싸인펜을 사용하셨는데 평소 원고는 만년필로 쓰셨다. 『엄마의 말뚝』은 1980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1982년 5월 8일에 육필 원고의 보관을 위해 다시 쓰신 것이다. 이번에 전시된 육필 원고『엄마의 말뚝』서두를 다시 읽어보면서 참으로 문장의 힘을 느꼈다. “이십 리 길을 걸어온 여덟 살 계집애의 눈에 고개는 마치 직립(直立)해 있는 것처럼 몰인정해 보였다.” 엄마는 그 몰인정한 고개를 얼마나 많이 넘어온 것일까? 참으로 놀랍고도 엄마가 자랑스럽다.

3. 큰딸 원숙과(2004)
엄마는 버리는 것을 좋아하셨다. 몸에 기운은 빠져 보이지만 얼굴은 맑고 개운한 표정으로 빛나 보일 때는 의레 물건을 정리해 잔뜩 버리고 난 뒤였다. 그리고 자랑을 하듯이 옷장이나 서랍을 열어 보이고 “헐렁해서 좋지. 이제야 살 것 같구나” 하며 가벼운 기쁨의 탄성을 내셨다.

엄마는 보자기에 싼 옷이나 책을 “너 좀 가져가라” 하며 주셨다.
그중에는 입으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옷도 있었다. 그래도 주는 것이 미안하신지 “네가 가려서 입든지 버리든지 마음대로 하고” 하시며 아무 군소리 없이 가져가는 나를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엄마가 물건을 버리고 난 후의 가뜬함이 느껴져 우리 집으로 들고 왔고 우리 집엔 엄마의 물건이 쌓이게 되었다.

1. 『도시의 흉년』연재 원고
엄마는 1980년대 후반부터는 르모라는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했고 그 후 줄곧 컴퓨터 노트북으로 원고를 쓰셨기 때문에 문학사상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육필 원고는 참으로 소중하다. 편집부의 교정 부호까지도 세세하게 볼 수 있어 들여다보면 40년 가까운 시간이 글씨로써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엄마의 글씨체는 호방하고 글과 같이 거침이 없고 속도가 빠르다. 엄마의 글씨를 보면 1970년대 작은 안방의 작은 찻상 위에서 글을 쓰던 엄마와 그 시대 분위기가 떠오른다.

2. 두상(조각가 이영학 作)
어머니가 이영학 선생님의 조각에 관한 글을 써주신 것이 인연이 되어 어머니의 두상을 만들어주셨다. 어머니가 쓰신 글이 고마워서 그 글을 놓고 절을 하셨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이영학 선생님의 서울 수유리 작업실에 찾아간 적이 있다. 항상 손수 준비한 미식으로 어머니를 위한 저녁을 차려주셨는데 겹벚꽃 피어 뚝뚝 떨어지는 봄날 마당에서 돼지고기 수육과 와인을 마셨던 시간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3. 단편『해산바가지』일부와 해산바가지
아마 해산바가지만큼 작품과 물건이 지닌 내력과 일치하고 직접 연관된 자료도 드물 것이다. 해산바가지는 내 나이와 같이 60년 가까이 되었고 할머니와 엄마의 산 역사이기도 하다. 1985년에 쓰신『해산바가지』단편 소설을 보고 나는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이면서도 생생한 가족사였고 할머니의 이야기였다.『엄마의 말뚝』이 엄마의 어머니의 이야기라면『해산바가지』는 엄마의 시어머니이며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할머니는 한글도 몰랐고 책을 본 적도 없고 글씨는 써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다섯 손주의 해산바라지를 지성껏 해주셨다. 늙어 망령이 들어 엄마를 힘들게 하셨지만 그 정성을 잊지 않으려고 그 작품을 쓰셨으리라. 그 작품을 읽을 때마다 우리를 길러주신 할머니가 고맙고 그런 소설을 쓰신 엄마가 존경스럽다.

1. 엄마의 액세서리
전시를 보러 온 누군가가 값나가는 물건은 별로 없다고 하는 말을 얼핏 들었다. 엄마는 다이아몬드를 지닌 적도 없었고 값나가는 보석을 가진 적도 없었다. 단지 아주 오래전 아버지가 선물한 빨간 루비 반지를 좋아하셨는데 나이가 드셔 손가락에 살이 빠지면서 반지를 흘려 잃어버리셨다. 참으로 서운해하셔서 비슷한 것을 해드리고 싶었는데 못해드리고 말았다. 여행지에서 산 비싸지 않은 작은 브로치를 즐겨 하셨다. 외출하실 때 옷을 차려입고 마지막에 브로치를 골라 달고 나가시는 모습이 산뜻하고도 여성스러웠다. 과시하기 위한 액세서리가 아니라 추억의 한 자락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던 엄마의 장신구는 하나하나 사랑스럽고 소중하다.

2. 이해인 수녀님께 보낸 편지(2005)
어려운 시기를 넘어갈 수 있게 공간과 시간을 마련해주는 도움을 주시고 친구를 해주셨다. 이해인 수녀님은 나에게도 언니처럼 친구처럼 대해주시면서도 귀여운 여자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다. 친형제・자매가 없었던 어머니에게 수녀님은 의지가 되었고 서로 기도로써 지켜주었다. 신앙의 인도자이면서도 늘 생활의 벗이었기에 지루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할 수 없는 속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숨통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수호천사처럼 우리 가족을 지켜주시는 수녀님이 정말 고맙다. 부디 건강하셔서 오래 우리 곁에 계시기를 빌 뿐이다.

3. 가족에게 보낸 편지
“원순이 보아라. 차 시간이 네 시로 변경돼 못 보고 떠났다. 케익은 똑같이 다섯 개 잘라놓았으니 싸우지 말고 먹고 원균이는 공부할 때 좀 더 주어도 된다. 제발 할머니 큰 소리 안 내시게 잘 받들고, 연탄불 꺼트리지 말고, 원균이 깨는 것 잊지 말아라. 케익 작은 것은 할머니 몫이니 너희들만 먹지 말고 들여라. 3000원 내놓았다. (스탠드 밑) 원태 300원 줘라. 월요일 도시락 반찬도 준비.”
『도시의 흉년』원고 파지 뒷면에 적어놓은 메모는 마치 소설의 장면과 연속 같다. 소설의 세계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입장권과도 같은 메모장. 입시를 앞둔 막내에게는 케이크 한 조각이라도 더 주고 싶은 엄마 마음, 연탄불을 꺼트릴까 둘째 딸에게 부탁하는 마음, 작은 것도 많은 자식들에게 공평하게 나누려는 마음, 망령 난 할머니에 대한 염려, 모든 것이 짧은 글에 들어 있다.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이지만 엄마의 숨결이 그립다.

기획 / 지희진 기자 사진 / 영인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