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소설은 뛰어난 문학이며 당대 현실 기록한 20세기 사회史
비범한 재능에 편벽되지 않은 인품 우리에게 '참된 재능'도 보여줘우리 시대의 어둠과 아픔과 비원(悲願)을 누구보다 생생하고 간절하게 그려낸 작가 박완서 선생이 돌아가셨다. 많은 추모객들의 애도 속에서 구리 토평동 성당의 미사에 이어 용인 땅에 묻히셨다. 선생의 빈자리가 그대로 허허벌판이 되어 적막강산으로 다가온다. 선생이 계심으로써 그나마 따뜻했던 우리의 겨울이 이렇게 맵고 춥기만 하다.
마지막 책이 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가 상자되었을 때 축하 모임을 계획했다. 그러나 굳이 자축(自祝) 형식을 고집하셔서 후배들이 대접을 받게 되었다. 작년 9월 15일의 일이다. 얼마 후 답례 날짜 조정을 꾀하였는데 선생의 사정으로 몇 차례 늦추어졌다. 1월 하순엔 선생을 뵙게 된다는 '현대문학' 양숙진 주간의 기별을 받은 직후에 부음을 접하게 되었으니 슬픔이 더욱 크다.
- ▲ 소녀처럼 맑은 웃음 속에 생의 고통과 비애를 모두 갈무리하고 오직 문학의 높은 경지를 쉼 없이 추구했던 소설가 박완서씨가 25일 흙으로 돌아갔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무겁고 고된 주부생활을 모범적으로 수행하는 한편으로 사십 줄에 들어서 시작한 선생의 작가생활은 휘황하고 폭발적인 40년이었다. 작품을 발표하는 족족 뉴스가 되었고 많은 애독자를 모았다. 다작(多作)이지만 들쭉날쭉 없이 고른 성취를 보여준 것이 박완서 문학의 특장이자 미덕이다. 처녀작 '나목'에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거쳐 마지막 장편 '그 남자네 집'으로 이어지는 소설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다루어진 작품은 없다.
6·25전쟁의 파괴적인 충격과 그 여파의 꼼꼼한 관찰과 묘사가 박완서 문학의 줏대 되는 주제이다. 당대 현실에 더없이 충실하면서도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은 생동하는 인물, 설득력 있는 세목, 감칠맛 나는 지문, 실감 나는 대화로 차 있다. 문학으로서 뛰어날 뿐 아니라 20세기 후반의 사회사로도 압권이다. 우수한 문학작품일수록 사회증언적 가치도 풍요하다는 문학사회학의 명제를 시퍼렇게 구현하고 있다.
'사랑이란 말은 하도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느라 그를 향한 내 지극한 갈구를 담기에는 너무도 닳아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엔 암만해도 딴 낱말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아무도 안 써본 슬프고 진한 어휘가.' '나목'에 나오는 이 대목은 시적 언어의 핵심을 요약해준다. 선생의 산문은 바로 이러한 '아무도 안 써본 슬프고 진한 어휘'의 탐구이기도 하다. 작중 인물의 심리적 음영(陰影)을 그리는 비범한 능력도 거기서 온다. 우리 시대의 악덕인 천덕스러움을 가차없이 비판하는 반속(反俗)정신도 출처는 동일하다.
- ▲ 동인문학상이 종신심사위원제를 도입한 2000년 여름 박완서씨가 동료 심사위원들과 후보작 심사를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유종호 박완서 이청준 김주영 이문열 김화영 정과리씨.
세상에서 말하는 재자가인(才子佳人)은 독선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어서 거부감을 일으키기 쉽다. 비상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부감을 촉발하지 않는 선생의 인품은 늘 참재능의 깊이를 실감케 해주었다. 섬세하고 호오(好惡)가 분명하지만 편벽되지 않고 모나지 않게 표하셨다. 깔끔하고 부드러우면서 쉽게 부화뇌동하지 않는 선생의 성품은 일품인 칼럼이나 산문에도 잘 드러나 있다.
글쓰기와 생활 영위 사이의 긴장을 조정해서 조화를 달성하기는 매우 어렵다. 선생은 그 조화를 성취해서 글쓰기에서나 생활에서나 전범이 돼주셨다. 왼손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많은 일을 하셨고, 그중에는 금전적인 도움도 많았다. 임종 직전까지 깨어 있는 의식을 유지했다는 최후가 선생의 일생과 인품을 말해준다. 한국의 어머니이자 국민작가요 스승이신 선생은 이제 저승의 별이 되셨다. 남아 있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선생의 안식을 기원하는 것뿐이라는 무력감 앞에서 막막함을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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