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완서에게 ‘40’이란 아름답고도 의미 있는 숫자다.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 올해로 작가 인생 40주년을 맞았기 때문. 그 숱한 시간이 ‘어느 틈엔가 지나간 줄도 모르게 지나갔다’고 말하는 노 작가의 얼굴에는 노을보다 더 고운 색채가 드리워져 있었다. | ||
한차례 소낙비로 초여름 더위가 한풀 꺾인 6월 어느 날, 박완서(79세)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은 한적하고도 상쾌했다. 서울시 평창동 북한산 기슭에 자리한 영인문학관(관장 강인숙)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특별히 선보인 전시회를 기념해 여러 문인들의 강연회가 열린 것. 이날은 박완서 작가의 강연이 있는 날이었다. 화강암 바위가 병풍처럼 드리워진 문학관 로비에서 노 작가는 일행들과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그 자리에 슬그머니 끼어 앉아 작가에게 안부를 물었다. 5월 말로 예정돼 있던 강연회가 작가의 갑작스러운 다리 부상으로 다소간 연기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정원으로 나와 소녀처럼 말갛게 웃으며 한껏 포즈도 잡아주었다. “저 꽃 참 곱다” “소나무가 너무 예쁘죠?”라고 말하면서. | ||
박완서 작가는 나이 마흔에 소설 <나목>으로 등단, 올해로 작가 인생 40주년을 맞았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강연장에는 중년을 훨씬 넘은 아주머니부터 스무 살쯤 돼 보이는 대학생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청중들이 이른 시간부터 빼곡히 앉아 있었다. 장녀이자 경운박물관 운영위원인 호원숙씨의 부축을 받으며 문학관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노 작가는 강연 시작 시간이 되자 강연회장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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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열등감과 비굴함은 총을 들지 않아도, 전장의 한복판에 서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전쟁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전에 입선한 작가가 들어온 겁니다. 그의 이력을 보고 깜짝 놀랐죠. 붓대 하나로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박수근 화백이 거룩하게 느껴졌고, 그분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증언하고 싶었어요.” | ||
전쟁과 분단이라는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20대를 보낸 작가는, 그로 인해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도 고스란히 겪게 되었다. 협박도 당했고, 어린 조카들을 업고서 임진강도 건너야 했다. 큰 어려움 없이 자라온 새침한 여대생이 사람들 앞에서 한껏 비굴해지고 아부하며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래, 이 순간을 잊지 않고 글로 쓰리라. 지금은 비록 무기력하지만 내 소설 속에서 반드시 복수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 큰 고비와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6·25가 없었더라면 내가 과연 글을 썼을까’ 하고. 당시에는 나 혼자만 엄청난 고통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만 자신을 다독이고 주변을 돌아보라. 비슷한 상황에서 더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고, 그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박완서 작가는 스스로에게 힘을 북돋아주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러면서 ‘내 문학도 다른 사람과 만나서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세상으로 나온 내 상처들이 다른 상처와 만나면서 더불어 치유되는 소통,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지닌 위대한 힘이자 생명력인 것이다. “지금은 많이 못 쓰고 있지만 머릿속에 이런 걸 써야지 하는 생각은 담겨 있어요. 쓰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건 행복한 겁니다. 아무 것도 쓸 게 없다면 돈 한 푼 없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이죠.” 1시간 30분 남짓의 강연이 끝나갈 즈음, 노 작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질문에 상세하게 답하느라 목소리가 갈라져 나올 정도였다. 얼마 전 입은 부상으로 오랜만의 나들이가 힘에 부칠 만도 할 텐데 말이다. 그런 작가에게 행사를 주최한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은 연신 고마움을 표하며 “넘어지셔도 좋으니 손은 다치지 마세요”라는 재치 있는 말로 강연장 내 청중들의 걱정을 한시름 덜어주었다. 이후에도 길게 늘어선 팬들의 사인 공세에 마지막 한 사람의 이름까지 일일이 써가며 다정하게 인사를 나눴다. 다과라도 좀 들다 가시라는 강 관장의 말에 그제야 손사래를 치며 얼른 가 눕고 싶다며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노 작가. 그 와중에도 끝까지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어주던 작가의 작은 어깨를 잊을 수가 없다. 다음엔 또 어떤 이야기로 우리들 마음을 쓰다듬어줄지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작가가 쓰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는 한, 우리도 그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게다. 때론 보이지 않는 데서 더 큰 위안을 받는 법이다. 그 가늠할 수 없는 형체에, 셀 수 없는 감흥에 위로받고 또다시 일어난다. 작가 박완서, 그 이름 석 자가 아마도 우리에게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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