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님

소설가 박완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던지는 희망 메세지

아기 달맞이 2011. 5. 4. 02:05

작가 박완서에게 ‘40’이란 아름답고도 의미 있는 숫자다.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 올해로 작가 인생 40주년을 맞았기 때문. 그 숱한 시간이 ‘어느 틈엔가 지나간 줄도 모르게 지나갔다’고 말하는 노 작가의 얼굴에는 노을보다 더 고운 색채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차례 소낙비로 초여름 더위가 한풀 꺾인 6월 어느 날, 박완서(79세)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은 한적하고도 상쾌했다. 서울시 평창동 북한산 기슭에 자리한 영인문학관(관장 강인숙)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특별히 선보인 전시회를 기념해 여러 문인들의 강연회가 열린 것. 이날은 박완서 작가의 강연이 있는 날이었다.
화강암 바위가 병풍처럼 드리워진 문학관 로비에서 노 작가는 일행들과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그 자리에 슬그머니 끼어 앉아 작가에게 안부를 물었다. 5월 말로 예정돼 있던 강연회가 작가의 갑작스러운 다리 부상으로 다소간 연기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정원으로 나와 소녀처럼 말갛게 웃으며 한껏 포즈도 잡아주었다. “저 꽃 참 곱다” “소나무가 너무 예쁘죠?”라고 말하면서.
 
 

박완서 작가는 나이 마흔에 소설 <나목>으로 등단, 올해로 작가 인생 40주년을 맞았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강연장에는 중년을 훨씬 넘은 아주머니부터 스무 살쯤 돼 보이는 대학생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청중들이 이른 시간부터 빼곡히 앉아 있었다. 장녀이자 경운박물관 운영위원인 호원숙씨의 부축을 받으며 문학관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노 작가는 강연 시작 시간이 되자 강연회장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강연은 제1회 한무숙문학상 수상작인 <환각의 나비>로 문을 열었다. 이 작품은 치매에 걸린 노인을 찾아나서는 딸에 대한 이야기로,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털어버린 자유로움으로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큰 나비’처럼 엄마도 어딘가에서 자유롭게 잘 지내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아주 친한 친구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20년 전에 집을 나갔는데 아직도 못 찾고 있어요. 그때 친구와 함께 양로원에도 가보고 방송국에도 가보고, 전단지도 돌렸지요. 심지어는 노인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는 비닐하우스 현장에도 가봤지만 못 찾았어요. 저는 이 작품을 통해 치매를 될 수 있으면 아름답게 그리고 싶었습니다. 내 글을 읽으며 친구 엄마도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작가는 치매란 남들이 보면 끔찍하지만 자신한테는 자유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젊든 늙든 누구나 행복해지길 원한다. 그리고 그 행복에는 자유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하고 싶은 건 하는 자유, 안 하고 싶은 건 안 하는 자유 말이다. 몇 년 전, 아는 분의 백수(白壽) 잔치를 보러 갔다가 입구에 전시된 그분의 조각보를 보면서 많은 걸 느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자식들은 끊임없이 헝겊 조각을 대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 천으로 실컷 작품을 만들며 얼마나 행복해했을까를 말이다. 늙는 것이야말로 예술이란다. 곱고 아름답게 늙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듯, 예술 또한 영감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의 최근작 <나 어릴 적에>는 ‘옛날이 그리워지는 행복한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마치 할머니가 손자에게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글을 써내려간다. 그 따뜻하고 소박한 추억을 통해 독자들도 잊고 지내던 가족 간의 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박완서 작가가 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한 데에는 가족,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지금 시대에 태어났으면 소설을 썼거나 한 가닥은 하셨을 분’이라고 설명했다. 책이 귀하던 시절, 어머니는 시집올 때 장롱 한 궤짝 가득 이야기책 필사본을 넣어왔단다. 다른 집 며느리들과 달리, 직접 쓴 책을 싣고 왔으니 시아버지 눈에 얼마나 예뻐 보였을까. 덕분에 ‘필체가 구슬 같은 며느리’라며 온 동네에 한껏 색다른 자랑을 휘날리고 다니셨다 한다.
“어느 날부턴가 동네 사람들이 우리 어머니께 편지를 대신 써달라고 부탁을 해왔어요. 그 당시 언문을 깨우쳤더라도 편지 쓰는 격식은 나름 까다로웠죠. 엄마가 뭐라고 쓰면 되냐고 물어본 후, 그걸 써서 읽어주면 사람들이 막 울었어요. 그저 써달라는 내용을 쓴 것뿐인데도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훔치곤 했지요. 어린 나이에 그런 엄마를 지켜보면서 어깨가 으쓱하고 자랑스러웠어요. 아마도 그때 글쓰기를 우러러본 것 같아요. 어슴푸레 말과 글의 차이를 느낀 거죠.”
작가의 어머니는 딸이 교사가 되길 원했다. 일제강점기 때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은 단연 교사였기 때문. 그래서 맏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행을 감행했다. 그래서 작가는 휴일이면 시립도서관 내 아동열람실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 삼매경에 빠질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대견스러워하며 도시락을 싸주셨다고 한다. 그때 접한 소설 <레미제라블>은 그녀의 작가 인생에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책장을 덮고 나오니 세상이 달라져 보이더군요. 빵 한 조각 훔쳤다고 한 인간이 어떻게 저리 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도둑질하는 사람은 아주 나쁜 놈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선과 악이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는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다 읽고 나니 마음이 참 아리더군요. 그러자 그 다음부터는 단순한 책이 잘 안 읽히더라고요.”
학교에 갔다 오면 어머니는 저녁마다 바느질을 하고, 작가는 옆에서 공부를 했다. 그때 <박씨부인전>이나 <삼국지>도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들었다. <삼국지>를 들려주면서는 직접 연기도 해 보이셨다고 한다. ‘옛다, 조조야, 칼 받아라!’ 하면서 손 안에 든 매서운 바늘을 훌쩍 넘겨주곤 했단다. 전쟁이 나지 않았더라면 대학도 졸업하고 어머니 소원대로 교사가 되어 있었을 거라는 말에 조금 아쉬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전쟁이 났기 때문에 우리는 위대한 작가의 더 위대한 작품을 만나게 된 것이다.

 
 
등단작이자 처녀작인 <나목>은 작가에게 가장 잊히지 않는 작품이다. 평범한 주부에게 작가라는 새로운 칭호를 달아줬기 때문이다. 5남매를 키우며 바쁘게 살다가,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가끔 아이들이 와서 보고는 ‘엄마 뭐해?’라고 물으면 ‘일기 쓴다’고 둘러대며 어렵게 완성한 글이다. 당선이 되면 신문에 나갈 자신의 얼굴을 보며 좋아할 어머니 모습을 떠올리며. 그렇게 탄생한 <나목>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 초상화부에서 함께 근무한 박수근 화백에 관한 이야기다. “서울대 국문과 입학하던 해에 전쟁이 났어요. 저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전쟁의 뒷면을 겪은 셈입니다. 폐허가 된 텅 빈 서울에 혼자 남겨진 기분. 그때의 공포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죠.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나서지 않으면 우리 식구들이 다 굶어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미군부대에 취업을 했어요. 나로선 대단한 변신의 기회였죠. 당시 인사담당자에게 영문과생이라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들어갔으니까요. 미술도 잘 모르던 내가 초상화부에 취직해서 한 일은 초상화를 그리라고 군인들을 꼬드기는 것이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한 달치 월급만 받고 관두자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지요.” 하지만 문제는 자신의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가족의 생계도 달린 문제였다. 작가가 나서야 그들 손에도 돈이 쥐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생판 모르는 미군에게 ‘유아 핸섬(You’re handsome)’이라고 말을 걸고는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면 군인들은 제각기 사연이 담긴 사진들을 꺼내 보여줬다. 작가는 이때다 싶어 ‘당신 초상을 그려서 애인이나 가족에게 보내주면 얼마나 좋아하겠느냐’며 고된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서울대 국문과를, 그것도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가 하는 일이란 고작 군인들을 도화지 앞으로 끌어 모으는 것이었다.
 
그 당시의 열등감과 비굴함은 총을 들지 않아도, 전장의 한복판에 서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전쟁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전에 입선한 작가가 들어온 겁니다. 그의 이력을 보고 깜짝 놀랐죠. 붓대 하나로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박수근 화백이 거룩하게 느껴졌고, 그분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증언하고 싶었어요.”
 
전쟁과 분단이라는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20대를 보낸 작가는, 그로 인해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도 고스란히 겪게 되었다. 협박도 당했고, 어린 조카들을 업고서 임진강도 건너야 했다. 큰 어려움 없이 자라온 새침한 여대생이 사람들 앞에서 한껏 비굴해지고 아부하며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래, 이 순간을 잊지 않고 글로 쓰리라. 지금은 비록 무기력하지만 내 소설 속에서 반드시 복수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 큰 고비와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6·25가 없었더라면 내가 과연 글을 썼을까’ 하고. 당시에는 나 혼자만 엄청난 고통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만 자신을 다독이고 주변을 돌아보라. 비슷한 상황에서 더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고, 그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박완서 작가는 스스로에게 힘을 북돋아주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러면서 ‘내 문학도 다른 사람과 만나서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세상으로 나온 내 상처들이 다른 상처와 만나면서 더불어 치유되는 소통,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지닌 위대한 힘이자 생명력인 것이다.
“지금은 많이 못 쓰고 있지만 머릿속에 이런 걸 써야지 하는 생각은 담겨 있어요. 쓰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건 행복한 겁니다. 아무 것도 쓸 게 없다면 돈 한 푼 없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이죠.”
1시간 30분 남짓의 강연이 끝나갈 즈음, 노 작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질문에 상세하게 답하느라 목소리가 갈라져 나올 정도였다. 얼마 전 입은 부상으로 오랜만의 나들이가 힘에 부칠 만도 할 텐데 말이다. 그런 작가에게 행사를 주최한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은 연신 고마움을 표하며 “넘어지셔도 좋으니 손은 다치지 마세요”라는 재치 있는 말로 강연장 내 청중들의 걱정을 한시름 덜어주었다.
이후에도 길게 늘어선 팬들의 사인 공세에 마지막 한 사람의 이름까지 일일이 써가며 다정하게 인사를 나눴다. 다과라도 좀 들다 가시라는 강 관장의 말에 그제야 손사래를 치며 얼른 가 눕고 싶다며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노 작가. 그 와중에도 끝까지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어주던 작가의 작은 어깨를 잊을 수가 없다.
다음엔 또 어떤 이야기로 우리들 마음을 쓰다듬어줄지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작가가 쓰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는 한, 우리도 그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게다.
때론 보이지 않는 데서 더 큰 위안을 받는 법이다. 그 가늠할 수 없는 형체에, 셀 수 없는 감흥에 위로받고 또다시 일어난다. 작가 박완서, 그 이름 석 자가 아마도 우리에게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