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방

다향에 눈을 감다

아기 달맞이 2011. 7. 8. 17:13
 

교교한 달빛이 비치는 밤, 책장을 넘기던 선비는 문득 고개를 들고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본다. 책상을 물리고 밖으로 나온 그의 코끝에 싸늘한 솔바람 냄새가 알싸하게 맴돈다. 그 순간 그가 그리워하는 건 맑고 향기로운 차 한 잔. 이내 손수 물동이를 들고서 찻물을 끓이기 위해 차디찬 샘물을 길러 간다.
조선 시대 지식인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차를 끓이며 지었다는 ‘자다(煮茶)’라는 시다.



 
 

차는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명상의 도구이자, 지인들과 편안한 담소를 나눌 때 빠질 수 없는 벗으로서, 각 나라와 지역마다 다양한 형태의 문화로 남아 있다. 요즈음 건강과 미용에 좋은 음료로 새로이 각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차의 역사는 대략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년경 신농 시대부터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약용으로 발견해 민간 상비약으로 애용하던 차는, 중국에서 전 세계로 전파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원시 시대에는 생엽을 그대로 씹어 먹다가 불의 발달과 함께 끓여 마시게 되었고, 이후 보관하기 쉽도록 말려 가공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제조 방법이 탄생했다. 동서양의 교역 과정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차는 라틴어의 ‘thee’에서 오늘날 영어의 ‘tea’라는 단어를 파생시키기도 했다. 중국과 우리나라 고려 시대까지 대개 떡차를 갈아 가루차로 마셨는데, 명나라 때부터 오늘날과 같은 잎차 형태의 차가 보편화했다. 우리나라는 신라 흥덕왕(828년) 때 사신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들여온 후부터 사찰을 중심으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처럼 카페와 커피 전문점이 유행하기 전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보편적이었던 ‘다방(茶房)’이라는 말도 원래는 ‘다방 커피’를 파는 곳이 아니라, 고려 시대 때 대제전이나 불교 의식에 행하던 다례 의식을 관장하던 국가 기구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 당시 차는 선(禪)을 행하는 중요한 의식으로 여겨 아침마다 부처님에게 차를 공양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명절에도 다례를 지내는 풍습이 백성들에게도 널리 정착되었다. 오늘날 명절에 ‘차례’를 지낸다고 말하는 것의 어원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하겠다. 다만 조선 시대부터 차 대신 술을 올리는 풍습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한국의 다도를 정립한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 초의선사(草衣禪師)와, 실학의 대가인 다산(茶山) 정약용, 그리고 서예가이자 금석학자로서 한 획을 그은 추사 김정희, 이 세 거성의 특별한 인연과 교류에서는 차를 빼놓을 수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초의선사와 추사는 차를 마시며 선사상과 문예를 논하던 평생의 벗이었다. 또 다산이 지은 <동다기(東茶記)>와 초의선사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은 한국 차문화에 있어 중요한 업적으로 남아 있다.
세속에서의 이름이 장의순이었던 초의선사는 정조 10년 전남 무안군에서 태어났다. 조선 후기 불교계가 선수행만을 강조했던 데 반해, 초의는 출가인으로서 삶과 현실인으로서 삶을 분별하지 않고 지혜로써 관조한다는 지관(止觀) 수행을 중시했다. 특히 차를 달여 마시는 일상 속에서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불교계에 명성을 떨쳤으며, 당대 지식인들과도 두루 교류했다. 후에는 대흥사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폐허가 된 일지암(一枝庵)을 재건하여 40여 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정진, 차와 시를 벗하는 다인(茶人)의 삶을 살며 자신의 사상과 차에 관한 저술 작업에 몰두하다 서쪽 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입적했다. 초의가 지은 <다신전(茶神傳)>에는 차 만드는 법, 보관법, 마시는 법, 물 끓이는 법 등 22개 항목이 상세히 저술되어 있으며, <동다송>에는 한국 토속 차의 우수한 맛과 약효가 기록되어 있다.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의 만남은 다산이 신유사옥으로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때부터 시작된다. 다산은 처음에는 주막집 뒷방에 방 하나를 얻어 살다가 백련사의 혜장선사를 만나 벗이 되면서 고성사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초의선사를 만나고 차의 향취도 처음 알게 되었다. 1808년부터 시작된 다산초당에서의 10년간 유배 생활 동안 그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후세에 길이 남을 저작들을 저술했는데, 바로 이 시기에 차나무를 손수 심어 차를 만들어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차에 관한 다시(茶詩)도 47편이나 남긴 다산은 10년 후인 1818년 귀양 생활을 끝마치고 다산초당을 떠나는데, 귀양 기간 동안 만난 제자들을 모아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어 그? 후로도 계속 차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초의선사와 더불어 추사 김정희는 우리 고유의 차를 유독 사랑한 지식인이었다. 그에게는 추사 말고도 수많은 호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 승설차를 대접받은 추억에서 지은 ‘승설학인(勝雪學人)’을 비롯, ‘다로(茶老)’ ‘고다암(苦茶庵)’ 등 차와 관련한 것들이 많다. 또 자신의 서재도 ‘일로향실(一爐香室)’ ‘죽로지실(竹爐之室)’과 같이 차를 끓이는 다실(茶室)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이름으로 지어 불렀다. 차의 향과 맛을 깊이 음미하고 그 효능을 예찬했던 추사는, 차를 마시는 것을 통해 사유에 몰입하고 창작의 영감을 얻기도 했다. 또 다구라든가 차 만드는 방법 등 차와 관련한 제반 지식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초의선사에게서 받은 차의 맛을 본 후 “차를 너무 많이 덖어 정기가 없어진 듯하니 불을 잘 살피라”와 같은 조언을 하기도 할 정도로 추사는 차 애호가이자 전문가였다.
이렇게 차를 매개로 초의선사와 우정을 나누던 추사는, 아끼는 벗보다 10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초의는 제문을 지어 슬퍼하며 먼저 간 벗을 기렸다.
“42년의 깊은 우정을 잊지 말고 저 세상에서 만나 오랫동안 인연을 맺읍시다. (중략) 손수 달인 뇌협차(雷莢茶)와 설유차(雪乳茶) 함께 나누며, 슬픈 소식을 들으면 그대는 눈물을 뿌려 옷깃을 적셨지요. 생전에 말하던 그대 모습 지금도 거울처럼 또렷하여 그대 잃은 나의 슬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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