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해남] 푸근한 녹색 겨울

아기 달맞이 2010. 1. 2. 07:43

모래들農場

'동래불사동(冬來不似冬)'. 해남의 겨울은 겨울 같지 않다. 이곳에서는 달력에 나타나는 겨울도 봄이기 때문이다. 눈을 맞아 흰 갓을 쓴 월동배추는 이제 해남의 상징이다.

"겨울 해남 들녘엔 이제 막 순을 쳐올린 보리에서 녹차잎, 월동배추 등 연두색에서 짙은 녹색까지 녹색 작물로 가득하다. 멋드러지게 꾸민 조경도 아니고, 잘 가꿔진 식물원도 아니다.

매일 식탁에 올라오는 먹을거리의 재료일 뿐. 그러나 겨울 들녘에서 맞이하는 푸른 자연은 강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해남은 함박눈이 쏟아져도 금방 녹아내린다. 이 고장에서 '봄에 대한 기다림'은 겨울 한 철이 아니라, 눈이 녹는 단 며칠간에 불과하다.

어디에나 펼쳐진 푸른 들녘이 이를 말해준다. 월동배추, 보리, 마늘, 녹차 등 연두색에서 짙은 녹색까지 단계별로 채도가 다른 초록빛 작물이 들녘에 가득하다.

멋드러지게 꾸민 조경도 아니고, 잘 가꿔진 식물원도 아니다. 매일 식탁에 올라오는 먹을거리의 재료일 뿐. 그러나 겨울 들녘에서 맞이하는 푸른 자연은 강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세상의 모든 빛깔 중 이보다 질리지 않고 반가운 빛깔이 또 있을까. 한겨울에 만나는 그 싱그러운 빛깔 앞에서 추위로 움츠러들었던 감성이 일제히 꿈틀댄다. 군대 간 남자친구가 조기 전역할 때의 심정이랄까. 예상치 않았던 기쁨이 솟는다. 해남 여행의 들머리는 초록빛이 주는 신비한 에너지를 호흡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겨울, 해남 어디를 가든 초록 여행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월동배추밭을 만난다. 비옥한 황토 언덕에 끝없이 펼쳐진 배추밭은 12월이면 그 푸름이 절정에 이르러 마치 봄이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0월에 심어 한겨울인 1~2월에 출하하는 월동배추는 이곳 해남이 주산지이고 국내 소비량의 대부분을 생산한다.

늦겨울, 도시인이 김장 김치에 물릴 때쯤 반가운 풋김치 맛을 선사해 주는 기특한 배추다. 봄보다 이른 봄, 아니 겨울 속 봄의 꿈을 안고 자라는 신선한 배추는 황토 고랑 사이를 누비며 밭을 일구는 아낙의 부지런한 손길에 무럭무럭 자란다.

:: 산이반도 월동배추
함박눈이 퍼붓는 겨울날, 해남의 산이반도를 달리고 있다면 그 여행자는 행운이다.

하얀 눈이 황토를 가리고, 얕은 언덕을 하나 넘을 때마다 눈의 정취는 더 소복해진다. 황토가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을 때쯤, 배추 포기는 흰 갓을 쓴다.

푸른빛을 내는 배추 밑단과 하얀 눈이 쌓인 상단부는 눈사람 같기도 하고, 얼음 위에 선 펭귄 같기도 하다. 밭이 넓어 한 이랑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눈 내린 배추밭 풍경은 '푸른 해남'이 주는 으뜸 볼거리다.

사실 산이반도는 해남군에서 척박한 땅에 속했다. 읍에서 면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가장 늦게 준공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겨울 작물 덕분에 해남에서 알아주는 부촌이 되었다. 월동배추가 산이반도를 뒤덮을 정도로 많이 생산된 지는 불과 7~8년, 그전까지는 소규모'채전밭'에 일구었을 뿐이다.

월동배추의 원산지는 일본, 처음에는 일본에서 종자를 들여와 심었다. 추운 겨울을 나는 월동배추는 수분이 많다. 사람들이 이 배추를 '다디달다'고 하는 이유도 배춧잎에 흥건한 수분 때문이다.

또한 해풍을 맞은 배추는 쉽게 시들지 않는다. 이 배추는 다른 지방의 농사일이 끝나가는 10월 초까지 밭에 심는다.

11월 말이 돼도 배추 속이 완전히 들어차지 않지만, 그래도 배추는 상인들에게 밭떼기로 팔려나간다. 따뜻한 해풍이 불어 12월에도 작물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산이반도 말고도 황산반도, 진도로 들어가는 문내면 등이 해남의 3대 배추 벌판이다. 사실, 지천에 널린 배추밭이 '여행 상품'으로 이목을 끌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농부의 땀이 밴 질펀한 황토밭. 그러나 여행객에게는 다른 어떤 것보다 싱싱한 풍경을 제공한다.

:: 푸른 갯벌
"이놈 없으면 낙지 못 잡어, 뻘에 빠져서 못 나와분디." '마지막 남은 낙지공장'이라는 황산면 산소리(한자리)에서 낙지잡이를 마치고 나오는 한 아낙은 나무로 만든 사각통을 가리키며 특이한 용법을 설명해준다.

갯벌이 고와서 허리춤까지 빠지기 때문에 지지 도구로 쓰는 이 '뻘통'이 없으면 갯벌을 헤치고 다닐 수가 없단다. 자세히 보니 '낙지잡이 선수'들이 드나드는 갯벌 초입에는 이런 '뻘통'이 나란히 놓여 있다.

맨손으로 낙지를 잡을 수 있는 곳은 해남에서도 몇 곳 남아 있지 않다. 세계적으로 싱싱한 갯벌이라는 해남의 '뻘밭'도 간척 사업으로 차츰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황산면 남쪽 바다 갯벌과 송지면 땅끝 쪽 그리고 강진만을 앞에 둔 북일면 갯벌 정도가 남아 있을 뿐. 해남 명물 중 하나였던 황산면 징의도의 '짱뚱어'도 작년부터 자취를 감춰버렸다고 한다.

황산면에서는 한자리 일대의 갯벌과 송지면에서는 노루목·대죽·중리 앞바다, 북일면 일대에서는 내동 바다가 아직 성성한 푸름을 간직한 갯벌이다.

현장에서 사 먹을 수 있는 오리지널 '뻘낙지'는 값이 싼 편이다. 크기에 상관없이 한 마리에 2,000~3,000원이면 바로 맛볼 수 있다.

푸른 기를 머금은 싱싱한 갯벌에서 막 건져올린 산낙지를 입 안 가득 넣고 오물거리면, 단물이 질끔 배어나온다. 이런 게 바로 생생한 여행이 아닐까? 겨울철 해남의 갯벌에서 나는 싱싱한 산물은 산낙지와 돌에 붙어 자라는 굴, 가두리 양식으로 재배하는 전복이 대표할 만하다.

:: Tips - 녹색 드라이브 코스
산이면 일대는 겨울이면 전국의 배추장수가 모여드는 곳. 산이반도는 지리산 시루봉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아름다운 언덕'이 있어 드라이브가 더욱 즐겁다.

산이반도는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IC'를 진출입하기 위한 관문으로 해남을 여행할 때 꼭 한 번 가볼 만한 곳이다.

:: 12월에 피는 녹차꽃
두륜산을 비롯해 가락산, 백봉산 등 바다를 바라보는 해남의 산자락 낮은 비탈에는 짙푸른 초록빛 녹차밭이 차지하고 있다.

차로 드라이브하며 충분히 그 모습을 즐길 수 있는 배추나 마늘과 달리, 시간을 할애해 다원을 찾아야만 만날 수 있다.

비옥한 황토에 뿌리를 내리고 산자락을 병풍 삼아 해풍을 맞고 자라는 해남의 녹차는 떫은맛이 적고 아미노산이 풍부하다.

찻잎 사이로 하얗고 노란 꽃이 언뜻언뜻 고운 얼굴을 내비치는데, 12월에서 2월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차 안에 부처의 진리와 명상의 기쁨이 모두 녹아 있다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으로 한국 다도의 성인으로 칭해지는 초의선사가 두륜산 대흥사의 일지암에 거했기에 차 문화의 성지로 일컫는 해남이다.

그러나 초의선사 이후 잊혀진 차 문화는 1980년대에 일지암이 복원되면서 그 중요성이 새로이 인식되었다. 농약이나 화학 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사로 재배하는 다원에서는 더욱 건강한 녹차를 내놓는다.

:: Tips - 녹차꽃과 다도 체험
북일면 삼성마을, 두륜산 자락의 설아다원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를 가져보는 다도 체험이 가능하다.

다도 예절, 다구 설명, 차를 맛있게 우리는 법, 차를 마시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체험과 교육이 이루어진다.
>> Data 061-533-3083 | 참가비 1만원(민박 이용자는 무료)


[그림설명] 1 마산면 연구리의 '총각무'밭에서 작업하는 아낙들. 2 달마산 방송 중계탑. 겨울 산이지만 아직도 푸르다. 3 잘 자란 월동배추를 안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아주머니. 4 고요한 내동의 포구. 5 송지면 한자리 갯벌에서 낙지를 잡는 아낙. 6 보리가 벌써 한 움큼이나 자랐다. 해남의 식당엔 벌써 보리순을 넣고 끓인 된장국이 올라온다. 7 녹차꽃은 1월까지 피고 진다. 8 차의 꽃잎을 넣어 끓이는 '녹차꽃차'향이 그만이다.

writer 홍의경 photographer 현일수, 이창곤, 윤영식(해남신문)

발췌 : 애니카 라이프 > 자동차로 떠나는 여행 > 주말 가족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