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가는 길목에서 한발자국 벗어나 있는 홍천 수타사.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둘러봤을 것이다. 하지만 수타사 계곡을 따라 아름다운 숲길이 새로 조성된 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강원도가 지난 여름 ‘산소길’이란 이름으로 걷기 좋은 길을 선정했는데, 홍천군에선 수타사길이 첫 산소길로 꼽혔다.
수타사 뒤편도 공원처럼 꾸며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수타사 산소길은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 못지 않다.
사실 겨울에 산소길이란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식물이 영양분을 흡수하기 위해 이산화탄소를 흡수, 탄소를 취하고 산소를 내뿜는다. 겨울철엔 아무래도 이러한 광합성 작용이 활발하지 않다. 따라서 식물의 산소 생산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후텁지근한 여름보다 겨울철 공기가 맑다고 느껴질까? 아마도 여름에는 공기가 체온처럼 따뜻해서 허파를 파고드는 공기의 질감까지 느끼지 못해서일 것이다. 반면 겨울철엔 허파꽈리가 움찔해대는 맑고 차가운 공기의 결을 느끼게 된다. 공기도 맥주처럼 시원해야 좋다. 그래야 산소알갱이들이 몸에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겨울철엔 사람도 많지 않다. 천천히 느리게 걸어도 된다. 주말 설악산과 북한산에선 걷는 속도도 남들과 맞춰야 한다. 거긴 등산로에서 교통체증까지 있다.
산소길은 수타사 옆 연지에서 시작됐다. 연이 다 시들고, 얼음장까지 낀 연못 옆으로 숲길이 보였다. 여기가 출발점이다. 한 두 사람이 다닐 만큼 길은 좁았다. 말 그대로 오솔길이다. 활엽수가 많아서인지 길엔 낙엽이 수북했다. 낙엽도 형형색색이다. 검은 빛을 띤 낙엽도 보였다. 숲해설사 손종호씨는 검은 것은 뽕잎이라고 했다. 뽕나무와 소나무, 옻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섞여있는 자연림이란다. 아름드리 거목은 쉬 눈에 띄지 않았고, 나무도 잘았지만 나무의 생김새는 제각각이었다. 잎이 다 떨어져 나무를 쉽게 구분할 순 없었지만 제각각 다른 외피, 얼굴을 하고 있다.
숲길은 계곡을 끼고 이어졌다. 반듯하게 펴진 길은 하나도 없었다. 산 허리를 따라 놓였으니 산을 파고들면서 길이 열린다. 산의 옆구리를 돌고 돌아가는 길은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굽이진 강줄기를 닮았다. 그 아래 계곡수는 산을 껴안고 흐른다. 길의 높고 낮음의 편차는 거의 없었다. 눈에 거의 띄지 않을 정도로 서서히 조금씩 각도가 높아졌다. 가파르지 않았으며 팍팍하게 오르는 가풀막도 없었다.
대체 이 길은 언제 생겨났을까? 홍천군청 관광담당 김설휘씨는 “원래 수로가 있던 길”이라며 “올 여름 조성했다”고 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수타계곡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수로가 있었고 한쪽은 오솔길이 있었단다. 수로는 수타사 아래 사하촌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요량으로 계곡물을 받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지난해 이 수로를 지하에 묻은 뒤 길을 만들었다. 이 계곡물을 지하수로를 통해 수타사 앞 연지로 흘려보낸다. 그리고 계곡 건너편 길은 수타사 윗마을 신봉사람들이 홍천에 장보러 다닐 때 가던 옛길이다.
새로 조성했다지만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숲길이었다. 흙길에 낙엽까지 수북했으니 여행자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길을 조성할 때 산을 깎아 만든 게 아니라 사람 한 명 지나다닐 정도로 좁게 만들었다. 길을 펴고 넓혔으면 운치없고 생뚱맞은 길이 됐을 텐데 흠 잡을 데 없다. 수백년 전에 만들어진 길 같다. 왼쪽으로 수타계곡을 내려다보며 40~50분쯤 걷다보면 계곡으로 건너가게끔 자그마한 돌 이정표가 있다. 신봉 마을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귕소반환점이다. 여기서 돌아가면 수타사~귕소반환점~수타사 구간은 3.2㎞로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계곡엔 가장자리에 살얼음이 끼었다. 희미한 안개가 낮게 깔려 물을 따라 흘러가는 겨울 계곡은 고요했다. 계곡엔 징검다리가 놓여있었고 다시 건너편 산길과 이어졌다.
“저 기다랗게 생긴 소를 귕소라고 해요. 소여물통 닮아서 귕이라고 해요. 귕 아시나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귕’이 통나무를 파서 만든 소나 말의 여물통이라고 나와있다. 황해도, 강원도의 사투리란다.
귕소를 지나 숲길을 따라 내려가보면 시퍼런 못도 보였다.
“해마다 여기서 사람들이 한 두명 빠져 죽는데 올해는 다행히 희생자가 없었어요. 겉에선 안보이지만 물 속에 들어가면 동굴이 있대요. 물이 소용돌이쳐서 한 번 빠지면 못나온다고 해요. 남자가 빠지면 그 다음엔 여자가 빠지고. 어쨌든 여기서 실타래를 풀면 끝이 없을 정도로 들어간다는데…. 이 물이 수타사 우물과 연결됐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숲이 고요해서 계곡 옆 암반에 앉아 기공 수련을 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겨울 수타사도 고요했다. 절에서 만난 도경 스님은 보물로 지정된 <월인석보>가 수타사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수타(壽陀)란 게 삶과 죽음을 뜻해요. 주불전은 대적광전이지만 명부전이었으면 더 절 이름과 맞을 뻔했어요.”
절 입구의 부도밭도 예뻤다. 솔숲이 울창했는데 일제때 송진채취를 위해 생채기를 낸 흔적이 또렷했다.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다.
제주 올레길이 바다와 사귀는 길이고, 지리산 둘레길이 산마을 사람들의 애환이 얽힌 옛길이라면 수타사 산소길은 계곡길이다. 얼음장을 깨고 막 길러낸 계곡수 같이 차갑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그런 숲길이다.
▲여행길잡이
*서울~춘천고속도로를 타고 나와 중앙고속도로 홍천IC에서 빠지는 것이 빠르다. 홍천IC에서 20~30분이면 갈 수 있다.
양평에서 6번국도를 타고 홍천으로 이어지는 길도 좋다. 서울 춘천 고속도로가 생긴 뒤 차량이 많이 줄었다.
*수타사는 올 가을부터 주차료를 없앴다. 문화재 관람료도 안받는다.
*홍천군 남면 양덕원리에 있는 오복식당(033-432-6398)의 추어탕은 홍천 사람들에겐 꽤 유명한 맛집이다.
용접공이었던 남편 김종건씨(82)가 아프자 윤옥녀씨(73)가 23년 전 남편 병구완을 위해 추어탕 식당을 열었다고 한다. 수제비를 띄운 탕은 걸쭉했다.
김치엔 산초를 넣어서 톡 쏘는 맛이 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싫어할 수도 있다. 메뉴는 추어탕 하나뿐이다. 1인분 7000원.
*수타사에서 2~3분 정도 떨어진 칡사랑 메밀사랑은(033-436-0125)은 홍천군청 김설휘씨가 추천한 집이다. 막국수가 좋다고 했다.
<홍천 | 글·사진 최병준기자>
'그곳에 가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도 집밥 순례, 남양주 밥상 (0) | 2009.12.24 |
---|---|
철새 몰리는 한강, 탐조객도 몰린다 (0) | 2009.12.24 |
동강 절벽 사이 유리 구름다리 놨다 (0) | 2009.12.22 |
불편해도 가고 싶은 곳 ‘슬로시티’ 증도의 실험 (0) | 2009.12.22 |
새해맞이 일출 명소 BEST 10 (0) | 2009.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