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문득 고개 드니, 가을

아기 달맞이 2009. 9. 24. 08:01

고생해도 좋다 칠선계곡, 고생 없어 좋다 내장산 옛길


제주도에 파묻혀 18년간 사진만 찍다 돌아간 고(故) 김영갑(1957∼2005)은 자신이 담아낸 제주 하늘 사진 아래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을 햇살을 받아 적다’. 감히 그를 흉내내 말해 본다. ‘높푸른 가을 하늘을 베껴 적었다’.  출처:중앙일보
제주도에 파묻혀 18년간 사진만 찍다 돌아간 고(故) 김영갑(1957∼2005)은 자신이 담아낸 제주 하늘 사진 아래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을 햇살을 받아 적다’. 감히 그를 흉내내 말해 본다. ‘높푸른 가을 하늘을 베껴 적었다’. 출처:중앙일보


유난히 심란한 요즘입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니 리먼브러더스니 하는 수상한 외래어가 십년 만에 밥상머리 대화에 오르고, 한때 만인의 연인이었던 연예인이 세상을 등진 요즘입니다.


그래도 가을은 들었습니다. 제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해도, 오늘도 하늘은 부쩍 키가 컸습니다. 붉은 때깔 단풍은 하루가 다르게 남(南)으로 번지고, 억새는 아침·저녁으로 토실토실 살을 찌웁니다.


팔자 좋은 소리라고요. 글쎄요. 그럼 혹시, 단풍이 왜 붉게 물드는지 아시는지요. 그건, 호된 겨울을 견디기 위해서입니다. 매운 겨울바람에 얼어죽지 않으려고 몸 안의 물기를 제 스스로 빼내기 때문입니다. 억새가 제일 아름다울 때가 언제인지 아시는지요. 심술궂은 바람에 이리 치이고 저리 떠밀릴 때 억새는 가장 현란한 춤사위를 내보입니다. 햇빛 아래 놓인 다음에야 비로소 황금빛으로 출렁입니다.


앞으로 불어닥칠 삭풍 앞에 맞서려고 먼저 제 육신을 매조지 할 때 단풍은 가장 곱고 어여쁩니다. 바람이 거셀수록 억새의 몸짓은 화려합니다. 가을, 산과 들에서 배운 삶의 이치입니다.


지난주 지리산 칠선계곡에 올랐습니다. 깊은 계곡 너럭바위에 자리를 잡고 민박집 아주머니가 싸준 도시락 까먹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왠지 소란한 듯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저런, 사방이 단풍이었습니다. 기꺼운 마음에 한참을 올려다보다 문득 알았습니다. 단풍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의 길손에 반가이 안부를 묻고 있었습니다.


하루하루가 고달프시다고요. 들로 산으로 나오십시오. 거기서 이 텁텁한 삶 버텨낼 기운을 얻으십시오. 올해도 가을은 짧을 거랍니다.



따지고 보면 단풍 기사만큼 재미없는 여행 기사도 없다. 단풍 명소가 해마다 바뀌는 게 아니어서 재방송만 틀어댈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 여태의 단풍 명소에 없었던 새 코스 두 개를 자랑스레 내놓는다. 하나는 악명 자자한 지리산 칠선계곡이다. 전체 코스의 절반 정도만 10년간 막았던 것뿐인데 칠선계곡 하면 지레 겁부터 먹었다. 올 5월 통제구간이 제한적이나마 해제되면서 칠선계곡을 둘러싼 흉흉했던 소문도 많이 가셨다. 칠선계곡은 이번 가을, 가장 뜨거운 단풍 포인트로 꼽힌다. 다른 하나는, 내장산 옛 고갯길 트레킹이다. 가을마다 몰려드는 엄청난 인파에 휩쓸리지 않고 전국에서 제일 곱다는 내장산 단풍에 취할 수 있는 코스다. 난이도로 말하자면 칠선계곡은 최상급 산행에, 내장산 옛길은 가벼운 트레킹에 속한다. 지리산·내장산=손민호 기자


칠선계곡 잊었던 그 이름


지리산 칠선계곡은 흔히 국내 3대 계곡으로 통한다. 나머지 둘은 설악산의 천불동계곡과 한라산의 탐라계곡이란다. 누가 맨 먼저 갖다 붙인 것인지, 그 근거는 또 무엇인지, 백담계곡은 왜 빠졌고 사연 많은 피아골은 왜 없는지 알 길 만무하나 여하튼 산 타는 사람 사이에선 그렇게 불린다. 다만 여기서 분명한 건, 지리산의 그 허다한 계곡 중에서 칠선계곡이 으뜸으로 뽑혔다는 사실이다.


그런 칠선계곡이 1999년에 입산금지됐다. 워낙 험한 데다 사고가 잦았다는 게 이유다. 추성동 주차장에서 천왕봉까지 칠선계곡 9.7㎞ 구간은 지리산 탐방로 중에서 가장 긴 천왕봉 공략 루트다. 표고차가 1500m에 달하고, 산행 시간도 얼추 8시간을 헤아린다. 아무나 덤빌 수 있는 데가 아닌 것이다.


그 칠선계곡이 올 5월 개방됐다. 정확히 말하면, 자연휴식년제 구역으로 지정돼 출입이 통제됐던 비선담에서 천왕봉까지의 5.4㎞ 구간이 특별보호구역으로 이름이 바뀌어 제한적으로 개방됐다. 이 구간은 현재 일주일에 4일(월·목요일 입산, 화·금요일 하산), 하루 40명에게만 문이 열린다. 가이드 넷이 내내 동행한다. 1년 중 네 달(5∼6월, 9∼10월)만 길이 뚫리고, 산행 보름 전까지 지리산국립공원(jiri.knps.or.kr)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마쳐야 한다. 그러나 비선담 아래 4.3㎞ 구간은 자유로이 들고날 수 있다.


산행은 오전 6시40분 추성동 주차장에 집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출발과 함께 소위 ‘깔딱고개’가 등장한다. 한 시간쯤 고개를 넘고 돌면 두지터에 다다른다. 예닐곱 가구가 모여 사는 산골마을이다. 두지터를 지나 칠선계곡을 끼고 오른다. 탐방로는 물길과 꽤 떨어져 있다. 혹여 모를 안전사고 때문이란다.


그렇게 걷기를 두 시간. 선녀탕에 근접하자 길은 계곡과 맞닿는다. 물가인지라 숲길보다 단풍 때깔이 훨씬 강렬하다. 비로소 칠선계곡 안에 들었다는 기분이 든다.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소(沼)의 내력을 가이드가 들려준다.


칠선계곡엔 폭포 7개와 소 33개가 있다. 계곡 안에서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70∼80년대 히말라야 원정팀이 왜 여기까지 들어와 전지훈련을 했는지, 왜 이 계곡이 그토록 악명이 자자한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계곡에 빼곡히 들어앉은 바위는 집채만 하고, 물길은 폭포처럼 거칠다. 계곡을 에워싼 숲은 원시림처럼 깊고, 사람의 때를 거의 안 탄 바위 위로는 이끼가 두껍다. 지리산 속살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한다.


오전 10시쯤 흔들다리를 건너 비선담에 이른다. 여기까지가 일반인이 다닐 수 있는 코스다. 칠선계곡의 상징이라는 칠선폭포와 대륙폭포는 특별보호구역 안에 있다. 그 계곡 위로 오를 생각은, 올해 접어야 한다. 특별보호구역 출입은 이달 말까지만 가능하고, 마지막 입산(30일)도 이미 예약이 마감돼서다.


▶Tip


자연휴식년제 시행 기간에도 추성동 주차장∼비선담 4.3㎞는 열려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칠선계곡은 아예 금지된 길로 알고 있었다. 지리산국립공원 양수민 가이드팀장은 “올 5월 이후 칠선계곡 관광객 숫자가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고 설명했다. 칠선계곡이 의외로 가까이 있다는 걸 우리가 잊고 살았던 거다. 칠선계곡 단풍은 이달 하순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여행사·산악회가 칠선계곡 산행을 계획하고 있다.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 055-972-7771.

계획하고 있다.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 055-972-7771.


출처:중앙일보
출처:중앙일보


내장산 옛길을 걷다


단풍 시즌, 내장산은 국민 관광지가 된다. 지금은 내장산으로 통하는 지방도로(792번, 894번)가 확장돼 그나마 덜해졌다지만, 몇 해 전만 해도 호남고속도로 정읍 IC∼내장산 IC 구간은 가을마다 혹독한 정체에 시달렸다.


수다한 단풍 명소 중에서 내장산이 맨 먼저 꼽히는 이유가 있다. 우선 내장산은 말 그대로 단풍놀이가 가능하다. 굳이 고된 산행을 작정하지 않더라도, 내장산에선 단풍을 만끽할 수 있다. 특히 백양사 주차장부터 이른바 단풍터널을 지나 백양사까지 1㎞ 남짓의 평탄한 숲길은, 오로지 단풍으로 현란하다. 하여 내장산 단풍 절정기라는 10월 말∼11월 초순 백양사 앞길은, 시쳇말로 사람에 떠밀려 다닐 정도로 미어터진다.

출처:중앙일보
출처:중앙일보


무엇보다 내장산 단풍은 어여쁘다. 소위 ‘아기단풍’이라 불리는, 아기 손바닥만 한 이파리의 단풍나무가 유독 여기서만 숲을 이룬다. 그 아기단풍에 드는 색깔이 유난히 진하고 곱다. 내장산 일대 기후 때문인지 단풍나무 품종 때문인지 똑 떨어지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아무튼 내장산 단풍이 제일이라는 데는 여행업계 대부분이 동의한다.


여기서 고민이 생긴다. 그 좋다는 내장산 단풍을, 인파에 치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국내 최고령 여행가이드 이종승(64)씨가 도움을 줬다. 지난해 가을, 내장산을 끼고 도는 옛 고갯길을 찾아냈다고 슬쩍 귀띔했다. 부리나케 그를 따라나섰다.


내장산 동남쪽 고개인 추령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30분쯤 걸어 능선 위로 올라섰다. 정면으로 서래봉이, 왼편으로 장군봉과 신선봉이 손에 잡힐 듯했다. 모두 내장산의 주요 봉우리다. 능선을 따라 걸으니 임진왜란 때 왜적을 유인해 물리쳤다는 유군치(留軍峙)에 당도했다. 거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장산을 내려왔다. 덕흥마을을 지나 곡두재까지 한적한 시골마을을 끼고 돌았다. 논두렁을 밟았고, 저수지 둑 위를 걸었다. 추수를 끝낸 논바닥엔 가을 햇살 받은 볏짚이 누렇게 누워 있었다.


곡두재에서 다시 내장산으로 들어왔다. 인적이 끊긴 옛길엔 수풀만 무성했다. 그러나 폭은 제법 넓었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 차가 이 고개를 넘었다는 얘기가 허풍이 아닌 듯싶었다. 고개를 넘자마자 갑자기 시야가 트였다. 백양사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아직 덜 여문 아기단풍이 발 아래서 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초록이 지쳐 붉게 물들어 있을 두 주일 뒤를 혼자 상상했다. 백양사를 내려오는 길, 다른 일행은 백양사를 오르고 있었다. 추령에 주차한 지 4시간쯤 뒤였다.


▶Tip


트레킹 코스엔 이정표도 마땅찮고 원점 회귀 코스가 아니어서 추령에 차를 세워놓았다면 천생 택시를 불러야 한다. 이 구간을 운행하는 시내버스도 없다. 이종승씨가 대표로 있는 트레킹 전문 승우여행사가 11월 1일부터 모두 다섯 차례 내장산 옛길 트레킹 상품을 운영한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