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범물동 전통찻집 ‘선향’

아기 달맞이 2009. 6. 5. 03:48

범물동 전통찻집 ‘선향’

 

살다보면 ‘분주하다’는 게 꼭 ‘여유롭다’는 말의 반대 개념은 아닐 듯싶다. 바쁜 일상에서도 짬을 낼 수 있는 여유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대구 수성구 범물2동 범물성당 옆에 위치한 전통찻집 ‘선향(仙鄕,053-783-1101)’은 빠르게 흐르는 시간과 번잡한 도시생활로 인해 늘 허덕이며 사는 사람들에게 한 모금의 차를 마시며 자연을 감상 할 수 있는 공간을 선사한다.

 

넓은 마당을 낀 한옥을 양옥으로 리모델링 한 후 찻집으로 개조해 2003년 봄에 문을 연 선향은 1층은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눌 수 있는 다예관으로, 2층은 살림집으로 꾸며졌다.

 

낮은 나무목책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면 좌우로 야생화 분경(盆景·화분에 화훼를 심어 자연의 경치를 꾸밈)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반긴다. 절기는 초겨울에 접어들었지만 가을 야생화인 시로미·설앵초·만병초·용담·해국 등이 아직도 꽃을 피우고 있다.

 

“우리 집은 특히 봄이 아름답습니다.” 10여년 넘게 야생화를 키워 온 안주인 박애경씨가 차를 내기 전 함께 마당을 둘러보며 집안 곳곳에 심어 둔 그녀만의 보물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대문 맞은 편 돌담장과 대나무 숲, 오죽 등도 직접 심고 가꿨다. 내부도 세련된 인테리어로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방을 틔어 만든 좌식 룸엔 연탄을 때워 찜질방 효과를 낸 바닥은 따뜻했다. 여성 고객들이 선호하는 자리다.

 

선향에선 주로 후 발효차인 보이차과 반 발효차에 속하는 청차 중에서도 명차로 알려진 철관음(우롱차), 무이수선, 동방미인으로 불리는 백호오룡 등을 선보이고 있다.

 

검은 구렁이가 휘감고 있다가 사라진 뒤 그 자리에서 난 찻잎을 채취해 차를 마셨더니 향기가 여느 때 보다 좋았다는데서 붙여진 우롱차(烏龍茶),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백호오룡차를 마시다가 “동방에 이런 차가 있었느냐”며 감탄했다고 붙여진 동방미인 등은 중국현지에서도 그대로 쓰이고 있는 명칭들이다.

 

박씨가 차에 관심을 두게 된 배경은 유학 간 남편(전 대학 중문과 교수)을 따라 대만에서 8년간 살면서부터. 이 때 취미로 하나 둘씩 명차와 다기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 현재 선향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다양한 다기가 됐고, 그 때 사 둔 보이차와 청차가 선향의 주 메뉴가 된 것이다. 모자라는 차는 해마다 대만에 거주하고 있는 자녀를 통해 소량씩 구입하기도 한다.

 

이곳에선 차를 견과류와 떡 등 다식과 함께 내고 있다. 요즘 들어서는 중년남성들이 부쩍 많이 찾고 있는데 건강을 생각해서 ‘술친구’ 대신 ‘차를 마시는 친구’가 되자는 모임이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귀띔이다.

 

중년여성 고객을 위해서는 미리 주문하면 차와 더불어 연잎밥도 제공된다. 오랫동안 차를 마시다 보면

식사 때를 놓치기 십상인데 단골들이 차만 팔지 말고 요깃거리도 제공해 봄이 어떠냐는 요구에 따른 것

이다.

 

처음엔 밋밋하던 보이차 맛이 떫으면서도 단 맛이 감도는 제 맛을 낸 즈음 테라스 너머 선향의 마당에

저녁노을이 찾아왔다. 선향, 신선들의 고향이란 뜻처럼 이 곳에 한 번 자리를 틀면 좀체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찻잔을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눌 친구와 마주한 모처럼의 한가로움을 다시 도심의 번거로움에 뺏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찻값은 5~6천원이며 연잎밥은 1인당 1만2천원을 받는다.

 

우문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