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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의 나무기행] 우리나라의 차나무 2 - 도심다원 차나무 수령 1,000년은 과장된 듯

아기 달맞이 2014. 4. 28. 08:04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자 녹지 역할도 하는 환경작물

차 씨앗을 가락국의 허왕후가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다. 구한말의 선구적인 역사학자인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김해의 백월산에 있는 죽로차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인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앗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허왕후의 이야기는 역사학자 김병모 교수가 쓴 <쌍어의 비밀>이라는 책에 아주 자세하고 흥미롭게 펼쳐져 있다. 허왕후가 차씨앗을 가지고 왔다면 아마 중국 사천성 보주산(普州産)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가 보주에서 왔으며, 당시 사천성에는 차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신라 30대 문무왕이 수로왕의 수릉왕묘(首陵王廟)에 제례를 할 때 가야의 풍습대로 차를 올렸다는 내용이 있다. 가야의 토기 중에는 찻잔, 고배 등 차와 관련된 것들이 많은데 이를 근거로 가야에 이미 차가 보급되었을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


▲ 1 고려시대 차문화의 품격을 말해 주는 고려청자상감국화문탁잔과 찻잔. 2 익산 야생차 북한계 군락지. 3 사대부들은 차 마시기를 즐겼다. 김홍도의 ‘군현도’.

상류사회의 애용품이 된 차

차나무는 삼국시대에 처음 유입된 후 서서히 전파되었다. 전문가들의 여러 견해가 있지만 필자는 차나무 재배지가 크게 늘어난 것은 경제적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나라의 음식문화는 차를 크게 필요로 하지 않았다. 찻잎이 많은 약리적 효용성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치료용으로 쓰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차는 말 그대로 음용수라 할 수 있다. 중국음식은 온통 기름진 것이 많아 차를 마셔야만 개운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게다가 옛날에는 이 닦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당연히 차가 필요했다.

반면 우리나라 음식은 동물성 식품이 적고, 조리과정에서도 기름을 많이 쓰는 튀김이나 볶음요리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음식을 먹고 나서 입속을 개운하게 하는 차를 그리 필요로 하지 않는다. 차보다는 밥을 하는 과정에서 눌어붙은 누룽지를 끓인 숭늉이 훨씬 더 맛있고 경제적이다.  산천이 수려하여 물도 좋다. 석회암질도 아니고 무기물이 적어 지하수를 퍼 올리면 바로 마실 수 있다. 기후도 선선하여 부패가 빠르게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차를 선호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차는 일찍이 특정계층의 기호품이 되었다. 왕실이나 귀족, 사찰에서 주로 애용된 것이다. 제조과정이 까다롭고 생산량이 적었기 때문에 가격도 비싸 평민이 차를 마신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사치였다. 이처럼 차는 상류계층의 애호품이자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차를 재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남부지방은 차 재배에 적당한 기후와 토양조건을 가지고 있어 아주 적격이었다. 바람이 많은 경상도 지방보다는 고온 다습한 전라도 지방이 더 적합하여 재배지가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에 번성한 차문화를 초의(草衣)가 중흥시켜

고려시대는 차문화가 널리 보급된 시기였다. 주로 왕실과 사원에서 차를 즐겨 마셨다. 주요 국가행사 때에는 왕에게 차를 올리는 진다의식을 행하였다. 궁중에서 여러 가지 행사에 차를 준비하여 올리는 등 찻일을 맡아 진행하는 관청인 다방(茶房)이 설치되었다. 다방에 소속되어 차의 일을 받드는 군사인 다군사(茶軍士)도 있었다.

사원에는 차를 재배하고 제조하기 위한 다소촌이 있었다. 차를 생산하여 나라에 바치는 다소(茶所)는 19개소나 되었다. 일반인들을 위한 찻집인 다점도 영업을 하였다. 귀족과 문인들도 차를 즐겼으며 이규보, 이인로, 정몽주, 이색 같은 문인들은 차에 관한 시를 다수 남겼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차가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청자 중 ‘청자국화문탁잔’ 등 많은 양의 아름다운 찻잔이 전해지고 있어 당시 차문화의 격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점차 자리를 잃어가자 불교와 함께 성행했던 차 문화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관혼상제 등 행사 때 올리던 차는 정화수와 술로 바뀌었다. 하지만 궁중이나 사대부들은 여전히 차를 즐겼으며 중국 사신을 위한 다례도 여전히 행해졌다. 사찰을 중심으로 한 차문화도 명맥을 이어갔다. 

차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영정조 이후다. 사학자 강명관 교수가 <조선풍속사>에서 이야기했듯이 조선 중기까지 우리나라의 산물은 매우 부족했다. 교통과 상업도 발달하지 못했다. 여전히 농업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인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조선 후기 들어 상공업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교통망이 확충되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본격적인 이동상인인 보부상 등이 생겨났다. 이런 활발한 교류를 타고 차문화도 빠르게 확산됐다.

김홍도의 ‘군현도’를 보면 사대부들이 시와 음악을 즐기고 있는 사이에 다동이 차를 끓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차를 마시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하나의 문화코드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차가 확산되면서 마침내 정조대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차문화는 중흥기를 맞게 된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우리나라 차문화의 중흥조로 불리는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다.


초의는 당대의 석학인 정약용, 김정희 등과 교류하면서 차를 깊이 연구하였다. 45세 때인 1830년에는 <다신전>을 펴냈다. 이 책은 중국의 백과사전인 <만보전서> 중 ‘다경채요’를 옮겨 적은 것이다.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도를 알리고자 하여 쓴 것으로 총 22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찻잎을 따는 방법에서부터 차를 만들고 보관하는 법, 찻물의 등급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내용을 담았다.

<다신전>에 이어 1837년에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었다. ‘동다송’은 초의가 차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정조대왕의 사위 홍현주와 진도부사 변지화 등 주변사람들이 차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여 지은 것이다. 이에는 차의 기원과 차나무의 생김새, 차의 효능과 제다법, 우리나라 차의 우월성 등이 시로 표현돼 있다. 이렇듯 초의선사의 여러 글을 보면 조선 후기에는 차가 이미 일상생활 깊숙이 스며든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

차문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인공재배되던 차나무가 울타리를 벗어나 산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개체의 번식으로 야생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는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야생차 서식지가 500여 곳에 이른다.   

그러나 한국의 야생 차나무는 크지 않다. 돌아본 바에 의하면 매우 작고 우거졌다. 교목이라 할 만한 큰 개체는 없고 모두 관목 수준이다. 야생차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인공의 느낌은 없으나 맛은 떫고 쓰다. 봄철에만 채취가 가능하며 가을 차는 너무 독해서 상품가치가 떨어진다. 소량만 채취, 생산되므로 자연히 값은 비싸다.


게다가 야생 차나무가 제도적으로 보호되지 않았으므로 노거수도 거의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는 경상남도 하동군 정금리 산 1-5번지 도심다원의 차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하동군이 조사를 의뢰해 2008년 7월 한국기록원이 인증한 것이다.

도심다원 차나무는 쌍계사 옆, 차 시배지 뒷산의 옛날 스님들이 모여 강론하던 회강이골 도심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200m 산중턱에 서식하고 있으며, 나무 높이는 420cm, 둘레는 57cm, 수관폭은 560cm이다. 이 차나무는 오래전부터 대나무와 활엽수림 사이에서 자생해 왔는데 1960년대부터 차밭을 새롭게 조성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 수세가 강하고 수형이 좋아 지금까지 보호되고 있다 한다.

한국기록원은 도심다원 차나무의 수령이 약 1천 년에 이른다는 인증서를 발급하였다. 하지만 많은 노거수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다닌 필자가 보기에 수령 1천년 인증은 매우 과장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무의 지름은 불과 18cm, 둘레는 57cm밖에 되지 않는다. 차나무가 아무리 더디게 자란다고 해도 1천 년 된 나무의 지름이 18cm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편, 한국차문화연구회 등의 단체에서도 최고 차나무에 대한 인증에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관광자원 발굴이라는 지자체의 욕심을 눈감아 줄 수도 있지만 하루빨리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차 전문가들은 질 좋은 야생차가 자라는 곳으로 전남 승주군 선암사 자생지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선암사 야생차단지는 오랫동안 맥이 잘 이어져 오고 있다. 절 입구와 절 뒤편 등에 잘 보존돼 있으며 자연조건 그대로 자라도록 하고 있다. 이곳의 수제차는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생산량이 적어 값도 비싸다. 필자가 상당기간 마셔본 이 수제차는 향이 그윽하고 깊으며 쇄락한 맛이 일품이다.

선암사는 일주문으로 들어서는 개울 건널목에 놓인 아치형의 승선교(보물 제400호)를 비롯하여 9개의 보물과 2천여 점의 문화재를 소장한 매우 아름다운 절이다. 특히 경내에는 좋은 나무들이 잘 식재되어 있어 오래된 전각들의 고절미를 더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두 그루 홍매화를 비롯한 매화나무와 절 뒤편 삼나무 숲의 향취에 빠지면 속세의 번잡함이 싹 가시는 곳이다.


▲ 1 아름다운 관광자원으로 변한 차밭. <대한다원 제공> 2 경남 하동군 도심다원의 최고 차나무. 3 선암사 야생차밭.
야생차 북한계선 익산

산으로 도망간 야생 차나무는 주로 경상남도, 전라남북도에 분포돼 있다. 주로 북위 33도30분(제주도)~36도5분(전북 익산시), 동경 126도10분(전남 함평군 구례군)~128도10분(경남 김해시) 사이의 지역에서 자라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북한계선은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 산 30번지다. 그동안 북한계 군락지가 북위 35도 13분인 김제군 금산사 일대로 알려져 왔는데 조사 결과 더 위쪽으로 북상하였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기후가 더 온난화되었다는 증거다.

함라산  줄기의 입점리 야생차 군락지는 조선 초기에 소실됐다고 전해지고 있는 임해사(臨海寺) 터에 자리하고 있는데 절이 없어진 후 차나무가 야생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3300여m²에 수천 그루의 1~30년생 차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생육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전문가들은 찻잎의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익산시는 차밭의 복원을 위해 인근에 수만 그루의 차나무를 식재하고, 시음장 전시관을 건설 중이었다. 그리고 군락지 입구에 ‘야생차 북 한계 군락지’라는 커다란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역시 관광자원을 개발한다는 목적이었다. 차나무가 본디 재배와 자생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으므로 판단을 유보하였다. 

익산 야생차 북한계 군락지를 보러 가거든 능선으로 올라가 서편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금강을 볼 것을 권한다. 멀리 산기슭을 휘감으며 은빛으로 흐르고 있는 금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강의 이름이 왜 ‘비단 강’인지 자연히 깨닫게 된다.



차나무는 산업작물, 환경작물이다

필자는 나무를 보존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에는 분명히 반대다. 무분별한 훼손과 남벌은 절대 안 되지만 그렇다고 보존에 주력해야 한다는 견해에는 부정적이다. 어차피 인류는 산림자원을 이용하면서 살아왔고, 또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효율적인 이용과 관리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차나무다. 차나무는 본래 야생종이었으나 인류가 꾸준히 개발하여 재배식물이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재배면적이 늘어나 이제는 어엿한 산업작물이 되었다. 많은 농가의 중요한 소득원이 되고 있으며, 녹지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므로 환경작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전라남도 보성지방에 차 재배지가 몰려 있다. 보성에서는 백제시대부터 차를 재배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다소가 있었으며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 차가 토산품이라 기록돼 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1939년 경성화학이 30ha에 차 종자를 파종하면서 차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1957년에는 대한다업이 경성화학의 야산을 인수하여 녹차 재배에 나섰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07년에는 무려 1,363농가에서 1,148.7ha의 녹차를 재배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특히 대한다원 등은 풍광이 아름다워 연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갈 정도로 좋은 관광자원이 되고 있으니 차나무는 아주 훌륭한 산업작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글·사진 김규 시인·중앙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