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 소설가 이문구씨 10주기 행사
"한결같이 겸손했던 분" 김주영·백낙청·이시영 등 문인 40명 한목소리 추모
"고향·전통 몰락한 현실서 농촌소설의 마지막 적통 문단서 상실 안타깝기만"
"문학상이든 문학관이든 기념사업이든, 자기 이름을 따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게 그의 유언이었죠. 겸손한 자세, 자기보다 남들을 더 배려하는 마음이 평생 한결같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정신 덕분에 우리에겐 크게 문학관을 지은 사람보다도 더 가슴에 진하게 남는 사람이 되었어요." 소설가 김주영(74)씨가 기억하는 동료작가 이문구의 모습이다.
<관촌수필>의 소설가 이문구씨가 타계한 지 10주기가 됐다. 2003년 2월 25일. 향년 62세의 느닷없는 부고로 한국 문단은 현대문학사의 빛나는 자산을 잃었다. 산업화로 와해되는 농촌 공동체의 현실을 끈끈한 토속어 문체로 그려낸 그의 소설들은 흥겹고 질박한 입말과 치열한 현실비판 의식으로 다시 보기 어려운 한국문학의 진풍경을 선사했다.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빈소를 가득 메웠던 많은 울음들은 이제 잦아졌지만, 어느덧 다시 이문구를 회고해야 하는 시간. 이문구의 삶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동료와 후배 문인들이 비공개행사로 마련한 '이문구를 생각하는 밤'이 26일 서울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열렸다. 문학평론가 백낙청 염무웅, 소설가 한승원 황석영 김주영 윤흥길, 시인 이시영 김정환 김사인 씨 등 고인과 가까웠던 문인 40여명이 모인 자리다.
↑ 26일 서울 연희문화창작촌에서 열린 '이문구를 생각하는 밤' 행사에서 소설가 황석영이 고인을 회고하고 있다. 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 10년 전 진갑을 맞은 아까운 나이에 세상과 이별한 이문구. 작고작가 사진전에 나온 이 사진은 '아이 첫돌잔치 때 댓돌에 앉아 끽연'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故 이문구
10년 전 장례식에서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이시영(64)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은 "한번 정을 주면 끝까지 간직하고 나눠줄 줄 아는 옛적 공동체 정신이 강한 작가였다"고 이문구를 회고했다. 유신시절 반독재운동을 함께 할 당시 성동서 유치장 옆방에 나란히 갇힌 적이 있다는 이 이사장은 "당시 친절하게 대해줬던 정보과 형사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계속 만나면서 인간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고. 천상 이야기꾼이었던 작가답게 입담도 대단했다. "유치장 옆방에 앉아 있으면 잡범들과 섞여 지내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느라 끊이지 않고 웃음소리가 들려와요. 출소했던 경범죄 사범이 며칠 후 다시 들어와서는 이문구 선생 이야기 듣고 싶어 왔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이야기꾼이었죠."
진영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 넓은 품은 이문구를 회고하는 문인들이 한 목소리로 그려내는 모습이다. 개인적으로는 군사독재에 맹렬하게 저항하고 치열하게 반체제운동에 참여하면서도, 문단의 보수를 대변하는 김동리를 문학적 아버지로 곡진하게 섬긴 일이 대표적이다. 김주영 작가는 "소설가 이문구는 이념으로 사람을 배척하지 않는 행동을 평생 보여줌으로써 인간적 신뢰를 얻은 분"이라며 "우리 문단의 선후배들에게 그런 정신을 남겨줬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들 가슴에 사무치게 남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문구의 죽음이 애달픈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김유정 이래 도도하게 이어져온 한국 농촌소설의 마지막 적통으로 한국문학사에 기록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문학평론가 염무웅(72)씨는 "고향이 사라지고 전통이 망가져 가는 현실을 몰락해가는 선비의 시선으로 포착한 이문구의 소설 세계는 고도 자본주의 시대에서 새로운 후배 작가들이 다시 복원하기 어려운 세계"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문구 10주기를 기리는 행사는 이 모임과 작가의 고향인 충남 보령에서 작가회의 충남지부가 치른 기념행사가 전부. 이문구라는 작가의 위상에 비춰보면 걸맞지 않은 대접이지만, 아마도 요란스런 행사라면 끔찍하게 싫어했던 고인의 눈치들을 보느라 그랬던 것 아닌가도 싶다. 당시 장례식 실무자였던 김정환 시인(59)은 "장례 때도 조촐하게 하라고 한 유언을 못 받들고 너무 거창하게 해서 죄송했었다"면서 "아마 10주기 행사도 크게 벌였다면 얼굴을 찌푸리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학상과 문학관 속에 박제되지 않고, 그 이름이 언제나 뜨겁게 울리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박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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