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3화

아기 달맞이 2012. 8. 22. 09:50

장교라는 자는 키가 장신에 수염도 그럴듯하고 얘기책에 나오는 대로 희번뜩 고리눈이어서 모두들 첫 대면에 기가 죽었던 것이다. 나는 대문을 두드릴 때부터 놀라서 사랑채 문 앞에까지 맨발로 뛰쳐나와 있던 터라, 그들의 행적을 문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는 아래윗니가 마주치는 소리를 내 귓속으로 들으며 얼른 안채로 달려가 방문을 꼭꼭 닫고 앉아 있었다. 까짓 제아무리 호랑이 앞의 개 처지라 하여도 발발 떨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귀신은 경문에 막히고, 사람은 인정에 막힌다니, 사리에 맞게 대하면 설마 죽이기야 할까.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길게 내뿜기를 두어 차례 하고 나서 안방 문을 열고 대청으로 나가 앉았다. 쿠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샛문이 열리면서 장교 복색과 군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왜 이리 소란이오?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들을 꾸짖자, 앞장 선 장교가 섬돌 아래 우뚝 서더니 껄껄 웃고는 말했다.

이 집은 그나마 여자가 담이 좀 세군. 우리는 녹림에 있는 사람들로 이 집 가산을 좀 취하려 하오. 부인은 놀라지 말고 방 안에 들어가 있으시오. 가솔들을 모두 몰아넣어라!

명길이와 행랑어멈이 먼저 버선발로 마루에 올라 안방으로 달려 들어왔고, 부엌에서 치마를 둘러쓰고 엎드려 있던 하녀들도 안방으로 쫓겨와 그야말로 아녀자들만 모여 있게 되었다. 누군가 따라 들어와 우리 머리 위에 이불을 둘러씌웠다. 나는 차츰 무섬증이 사라지고 깨가 고소한 생각까지 들었으니, 쌀섬을 지구 갈 일밖에는 남은 재물이 없을 터였다. 한참이나 사랑채와 별채와 안채를 훑고 나서 안방에도 들어와 장롱과 벽장을 뒤지더니 비단만 수십 필 말아 들고 나갔다. 우왕좌왕하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밖에서 우두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좀 나오시오.

내가 대청으로 나가자 두목은 빙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비가 있었던 듯한데…… 내가 총명한 부인을 겁박하면 숨긴 재물을 찾아낼 수 있을게요. 허나 사내대장부가 어찌 그런 좀스런 짓을 하겠소.

그는 함을 마루 위에 쾅 내려놓고, 안에서 각종 문서를 꺼내어 보여주고는 특히 치부책을 집어서 허공에 흔들어 보였다.

여기에 각종 토지대장과 문서가 있고, 특히 이 장부는 장리 환곡의 명세는 물론이고, 이 댁에서 들고난 채권채무 제반 사항이 모두 적혀 있소이다. 뒤에 사람을 보내어 때와 장소를 알려줄 터이니 돈 삼천 냥을 준비해두시오. 응하지 않으면 모두 불쏘시개나 할밖에.

그들은 그래도 재물이라 할 만한 물건들을 챙기고 함을 달랑 메고는 올 때와는 달리 백사지에 물 부은 듯 일시에 사라졌다. 행랑어멈이 광으로 달려가 빗장 지른 창대를 뽑아 던지고 갇혔던 사람들을 구원했다. 개도 텃세를 한다는데 제 동네에서 멀거니 눈 뜨고 백주에 당한 꼴이라, 국밥 값이라도 한다고 제각기 울끈불끈 뒷말이 무성하였다. 쫓아가서 뒤를 보자는 둥, 대둔산 것들이 틀림없으니 사람들을 모으고 관아에 알려 길목을 지키자는 둥, 그럴듯한 의논이 나왔으나 누구도 선뜻 대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나는 넋을 잃고 대청에 앉았다가 마름에게 물었다.

어쨌든 적경은 알려야겠지요?

얼굴이 새파랗던 마름도 이제는 혈색이 돌아와 채수염을 쳐들고 말했다.

예, 염려놓으십시오. 삼례역이 지척이니 당장 찰방에게 알리고, 감영으로 급파발을 놓으라 이르겠습니다.

저녁도 못 먹고 온 식구가 돌림병이라도 옮은 듯 모조리 구들장 지고 이불 둘러쓰고 늘어져 있었다. 두런두런 하는 소리가 들리고 전주에 나갔던 행랑아범이 오 동지와 함께 돌아온 모양이었다. 집안에 화적이 들었단 소식은 들었는지 그는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열어보았다.

어, 왜 이렇게 컴컴한가?

나는 일부러 골을 싸매고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 켜라는 소리에 하녀가 관솔에 불을 당겨와 쌍촛불을 켰고 그는 한참이나 내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나는 비녀가 헐렁해져 부스스한 머리를 두 손으로 쓸어내리지도 않고 비칠비칠 일어나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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