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동지 그 잡것이 겨우 추수 마치고, 소작인들 명년의 도지 약계를 매듭지을 틈도 없이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더니, 뒷일은 마름에게 맡겨두고 고쟁이에 헛방귀 새듯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감나무골 한동네에 사는 마름과 행랑아범이 도지를 권세로 작인들에게서 인정전을 먹기도 하고, 배, 곶감, 단밤, 갱엿, 이강주에, 인삼, 약초에 이르기까지 온갖 특산물을 가로챈다는 걸 나는 눈치채고 있었다. 평소에도 행랑어멈이 물건이 들어오면 내게 선을 뵈고 곡간과 찬광에 쟁여두는데 내가 몸소 하지 않고 열쇠를 내주었다가 거두기만 하던 것이다. 한 번은 의붓딸이지만 기른 정이 있다고 울 안에 보이질 않기에 이리저리 집 안을 찾아 둘러보다 행랑채에 이르니 주위가 조용하고 인기척이 없었다. 이제 열 살이 되었으니 함부로 바깥으로 싸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행랑채의 방문을 열었더니 벽장에 미처 넣지 못하고 쌓아둔 보퉁이며 대광주리가 보였다. 호기심이 일어나 살짝 들어가 헤쳐 보니 그게 모두 진귀한 진상품들이며 안채에도 바쳤던 물건들이고, 벽장 속에는 또한 꿀 항아리며 곶감이며 건어포가 축으로 쌓여 있었다. 밖에서 신 끄는 소리가 들려서 나는 얼른 벽장문을 닫고 마루로 나서는데, 행랑어멈이 앞치마에 뭔가 싸들고 들어오다 멈칫 섰다. 내가 먼저 당황하여 얼버무렸다.
명길이가 안 보이길래……
아씨는 별채에 기실 텐데요.
하루걸러 오는 독선생이 명길이에게 명심보감을 가르치는 시간이었던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그런 걸, 난 또 동네방네 싸돌아다니는 줄 알았네.
아유 그럴 리가요. 헌데 이거 좀 잡숴보시지요.
행랑어멈은 멋쩍은 얼굴로 앞치마에 가렸던 것을 내밀고는, 앙증맞은 약항아리의 뚜껑을 열어 보였다. 잘 삭은 냄새 때문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고추장에 담근 고들빼기 장아찌랍니다.
내 비록 나이도 어리고 살림 솜씨란 쌀 퍼다 개피떡 바꿔 먹을 년이지만, 그래도 어려서부터 주위에서 궁량은 아흔아홉 칸을 들었다 놓을 만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모처럼 얻은 것이니 아범 입맛이나 돋워드리게. 가내 잡사로 노심초사가 이만저만이 아닐 터인데.
그러고는 봄바람 같이 부드러운 웃음을 보여주고 안채로 돌아갔다. 내가 저희 방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 쟁여둔 진상품을 낱낱이 보았음을 저도 알고 나도 아는 셈이었다. 아무 말 않고 있어도 이년 두고 보자는 형국이 되어버린 거였다. 그날 저녁상을 물리고 모처럼 가야금을 무릎에 얹고 방아타령을 뜯고 있는데, 밖에서 좀 뵙겠다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섬돌 아래 행랑채의 부부가 다가서 있었다. 어멈은 속삭이듯이 제 남편이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하여 망설이다가 그들을 안방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내가 좌정하자 아범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제가 듣기로 안방마님께서 친정 나들이를 가신다기에, 제가 모시고 다녀올까 하여 여쭙습니다.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하면서도 나는 내색을 않고 대꾸했다.
어멈이 평소에 내가 하던 말을 유념하고 있던 모양이구려. 동지 어른이 출타하고 안 계시니 어찌 함부로 집을 비울 수가 있나?
옆에서 어멈이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더니 얼른 끼어든다.
그저 한 사날 다녀오시지요. 낼이나 모레나……
나는 어쩐지 그들이 조바심치는 속내가 궁금하여 떠보기로 하였다.
왜 그러지 않으면 무슨 큰 난리가 난대나?
행랑아범은 말을 못하고 꾸물대는데, 그 아낙이 대놓고 눈을 흘기더니 무릎을 내밀어 다가앉으며 말했다.
들은 대로 말씀드리라니까…… 읍내 장에 소문이 파다하답니다. 가을걷이를 하고 나서 인근 동네에도 화적이 출몰했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