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4화

아기 달맞이 2012. 8. 22. 09:51

이제 더 이상 이 집에서 못 살겠소. 이런 꼴을 당하고 가장에게 괄시를 받으며 살아갈 수는 없지요. 아들도 낳지 못하였으니 스스로 소박을 맞겠어요.

하고는 도적이 문서와 치부책을 가져가며 이르던 말을 찬찬히 전해주고, 뒤란 장독대에 귀중품을 숨겨놓았다는 말을 하자마자, 못난 것이 벌떡 일어나더니 재물을 찾으러 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옷자락에 지푸라기를 잔뜩 묻혀가지고 보퉁이를 찾아 돌아왔고, 보따리를 풀어헤치고는 일일이 확인을 했다. 골똘해 있는 얼굴을 보니 만정이 떨어져서 나는 그냥 방에서 나와 명길이가 있는 별채로 가버렸다.









 

이튿날 미리 싸두었던 간단한 옷 보따리를 들고 길을 떠나기 전에 오 동지와 대면하여 말했다.

이 길로 나는 친정으로 갑니다. 아낙이 우환 중에 집을 떠나는 것이 도리상 안된 일이지만, 환난은 모두 당신이 자초한 일이외다. 행랑아범과 마름이 당신의 수족이 아니라는 것만 잘 알아두어요. 누구를 원망하리요, 주인이 집을 메로 삼았으니 남들이 차지하고 사는 게지요.

그때까지만 하여도 빈부귀천은 하늘이 내리는 것인 줄만 알았더니, 민란과 화적이 들끓는 세태야말로 하늘의 뜻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말이 씨 된다고 나는 후살이로 석 삼 년을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강경나루 옥녀봉 아래 다리목 객주를 읍내에서 한두 번 묻고는 그냥 전부터 알던 길인 듯이 쉽게 찾았다. 엄마는 마당에 들어서던 나와 마주치자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섰는데, 놀란 눈 속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첫마디가 이랬다.

밥 먹었냐?

아직도 위쪽 가지에 따지 못한 감이 잔뜩 달린 감나무 두 그루가 마당에 섰고, 담은 그전 집처럼 싸리 울타리가 아니라 번듯한 돌담이었다. 남도 식 일자집에 마당 왼편에는 우물도 있었고 버드나무가 낭창한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앞채처럼 기와 올린 별채가 아니라, 어디서 꾸어다 놓은 듯 초가집 한 채가 뒷마당에 있었는데 살림집으로 쓰고 있었다. 대문간에도 창고와 마방이 들어서기 전이어서 초가 이엉을 얹은 헛간과 측간이 붙어 있었다. 이른 저녁이었지만 엄마가 들여온 겸상에 마주 앉았다. 나는 민물새우 넣고 끓인 아욱국을 한 숟가락 뜨다가 눈물을 똑 떨구었다. 이맘때의 아욱국은 시어미가 문 걸어 잠그고 며느리년 몰래 먹는다는데. 시집 밥은 명치에 걸리고 친정 밥은 속살이 찐다던가. 엄마는 내가 친정 나들이를 왔다고 여길 만큼 맹꽁이는 아니어서, 잘 마른 보리굴비를 쭉쭉 찢어서는 말없이 내 밥숟갈 위에 얹어주었다. 나는 엄마에게 콩이네 팥이네 여러 말 하지 않고 간단히 말했다.

오 서방이랑 갈라섰어요.

엄마는 석화에 버무린 무생채를 얹어주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자알 했다.

밥 다 먹고 나서 엄마가 곰방대에 불을 붙이더니 내게 물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구 지냈다만, 애는 놨냐?

고자는 아닌데 애가 안 섭디다.

것 참 깨고소하다. 외손주 낳았더면 내 속이 얼마나 아팠을꼬. 이별전 한 푼을 안 주데?

나는 엄마에게 오 동지가 가산 경영을 돌보지 않던 것이며, 노름 버릇 든 것이며, 화적이 들었던 일을 얘기책 읽어주듯 해주었다. 엄마는 놋쇠 재떨이에 곰방대를 탕탕 두드려 불티를 떨고는 키드득 웃으며 말했다.

두고 봐라, 제깟 놈이 며칠 내루 찾아 올 테니……

객점으로 쓰는 본채는 삼례 집보다 방의 크기가 좀더 컸을 뿐, 안방, 건넌방, 마루, 찬방, 부엌, 그리고 뒷방으로 거의 같은 구조였다. 안방과 건넌방을 술청 겸 봉놋방으로 쓰고, 뒷방은 내외하는 부녀자나, 처자와 동행인 손님을 받았다. 보행객주라 강경 장을 드나드는 보부상과 도부꾼을 받았지만 아직은 직접 물건을 받아 타지에 넘기는 일은 벌이지 못하고 있었다. 저녁밥 때가 지나서야 두런거리던 앞채의 인기척이 잦아들고 찬모와 장쇠가 와서 나를 반겨주었다. 이튿날부터 나도 부엌이나 찬방에서 일을 돕고 장쇠와 더불어 술밥을 나르고 하노라니 삼례 감나무골에 시집갔던 일은 전생의 일인 듯이 까맣게 잊어버렸다.

'연재소설·[황석영 연재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울물소리 16화  (0) 2012.10.05
여울물소리 15화  (0) 2012.08.22
여울물소리 13화  (0) 2012.08.22
여울물소리 12화  (0) 2012.08.22
여울물소리 11화  (0) 2012.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