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시인 엘리엇은 그랬습니다. 나는 내 인생을 커피 스푼으로 재왔다(I have measured out my life with coffee spoons). 전 단골 커피집 쿠폰에 찍힌 스탬프로 하루하루를 헤아립니다. 은밀한 뒷담화 시간엔 봉지커피가 또 제격이지요. ‘보내버리고 싶은 그들’ 때문에 까맣게 탄 가슴, 달달한 설탕과 크림으로 다독일 수밖에요.
“이번 N플러스 1면 기사는 자네가 한번 써보지?”
커피 한잔 사준 적 없는 부장님이 저를 콕 짚습니다. 그윽한 차향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고리타분한 기사는 됐고, 요즘 젊은이들도 즐겨 찾는 ‘트렌디한’ 곳을 찾아보랍니다. 어느 비 오는 봄날, 서울 인사동 한복판에 자리한 오설록 티하우스를 찾았습니다. 잘 안다는 후배 말만 믿고 따라나섰죠. 얘는 언제 이런 델 와봤나 모르겠습니다.
“이게 무슨 향이죠? 봄비 냄샌가요?”
후배는 벌써 ‘봄날의 녹차 아가씨’로 빙의했습니다. 이가영 점장이 “찻잎 덖는 향기”라고 일러줍니다. 1층 매장엔 덖음차를 비롯한 수많은 차와 함께 온갖 녹차 제품이 진열돼 있습니다. 마시고 바르고 뿌리기만 해도 건강해질 것 같은 이 느낌…. 후배는 이번엔 ‘엄마 따라 마트에 온 꼬마’로 빙의해 이것저것 만져 보는 중입니다.
“구수한 맛이 좋으세요, 깔끔한 맛이 좋으세요?” 다실이 갖춰진 3층에 올라가니 전윤정 티소믈리에가 다가와 묻습니다. 녹차 종류야 좀 알지요. 한마디로 어린잎일수록 비싸죠. 그런데 맛이라뇨? 그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생잎을 솥에 덖어 만든 덖음차는 구수한 향기와 은은한 단맛이, 찻잎을 수증기로 쪄서 가공한 증제차는 깔끔한 맛과 아름다운 빛깔이 일품이랍니다.
“선배, 우리도 차 한잔 해요!”
2층 카페로 내려가 한자리 차지하곤 안을 둘러봅니다. 모두 찻잔을 사이에 두고 상대방에 빠져 있더군요. 비도 긋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면서 뭔가 홀짝거릴 만한 데가 몽땅 커피집이라 다들 커피를 마시는 거겠지…. 이런 생각에 젖었는데 어느새 직원이 찻주전자를 들고 옵니다.
“흐음~차향 좋다.” “빛깔도 곱네.”
띠동갑 후배와의 티타임, 어땠냐고요? 어깨를 누르던 마감 스트레스를 잠시 잊은 건 물론이요, 바쁜 나날 속 데면데면하던 선후배 사이가 성큼 가까워진 기분입니다. 후배가 얼마 전 앞머리를 자른 것도, 오늘 예쁜 스카프를 매고 온 것도, 내일 야구장에 갈 거란 것도 모르고 지날 뻔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티’가 아니라 ‘타임’이더군요.
“다음엔 제가 차 살게요. 근사한 델 알거든요.”
얼마 전 취재한 허브 마니아가 그랬습니다. “허브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요. 차도 마찬가지겠지요. 예쁜 찻잔을 사고, 맛난 차를 고르고, 소문난 찻집 찾아가 보고, 그러면서 다음번 차 약속을 잡고…. 말린 잎을 우린 민숭맨숭한 물만이 아니요, 이런 즐거움 모두가 ‘차’일 겁니다. 우리 둘도 이참에 ‘차’도녀가 돼보려고요.
◇촬영 협조=오설록 티하우스 인사점
손수정 기자, 사진=김병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