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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여름나기, 감물옷 어때요? |
'감나무'의 겉살, 속살을 나만큼 누리는 사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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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물로 만든 원피스형 조끼와 당의두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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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숙 |
| 문 밖을 나서서 몇 발자국만 걸으면 발에 돌부리 채이듯 볼 수 있는 감나무. 내가 사는 이곳 하동 악양은 대봉감으로 유명하다. 대봉감은 다른 감에 비해 크기도 크거니와 덩치 큰 놈이 싱겁고 실속 없다는 말을 무색하게 할 만큼 차지고, 단맛 또한 진하고 깊다.
덩치 값 제대로 하는 대봉감을 비롯한 감나무들이 주변에 널려서 기분 좋은, 감물염색의 계절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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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볕 좋은 날 잔디밭에 펼쳐 발색시키는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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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숙 |
| 염색을 하는 내가 하동에 주저앉기로 마음먹은 데는 나름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구구한 이유를 합리화 시키는 속사정에 악양골 마을마다 즐비한 감나무들이 차지하는 자리가 그리 작지 않다. 자연에 있는, 자연 그대로의 풀과 나무들이 온통 염료로만 보이니 '소(素)하고 담(淡)하게 자연에 물들기'를 앞세운 염색쟁이의 길목에 감나무만큼 무궁무진한 보물이 또 어디 있으랴.
한여름, 감물염색 원단으로 만든 옷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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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봉감으로 만든 감말랭이. 겨우내 맛난 간식거리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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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숙 |
| '감나무'의 겉살, 속살을 나만큼 유쾌하게 어루만지고 누리는 사람 있을까. 지난 가을엔 이웃의 친구와 6접의 감을 깎아 곶감과 감말랭이를 만들어 겨우내 우물거렸고, 올봄엔 여린 감잎으로 차도 만들어 봤다. 동네에 감나무는 지천이지만, 내가 심고 가꾼 나무들이 아니라 감히 손놀림은 자유롭지 못했지만 친구와 내 터에서 손닿는 감나무 잎 조금으로 뿌듯함을 누릴 만큼 얻은 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염색을 하는 나의 욕심을 채워준 또 다른 감나무의 매력은 즙을 내려 물을 들이는 일이다. 더위 많이 타고 땀 많이 흘리는 내게 한여름에 이용하는 감물염색 원단만큼 뽀송함과 쾌적함을 주는 것이 없으므로 난 이맘때면 주위에 감물 자랑을 늘어놓기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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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즙에 담갔다 말렸다 며칠을 반복하며 발색시키는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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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숙 |
| 감물염색은 충북 괴산에서 처음 경험했다. 증평의 '고래실'로 건너다니며 연방희 선생님께 염색을 배우던 시절, 봄학기로 3월에 시작한 6개월의 과정은 8월의 마지막 수업 때 감물염색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여러 명이 나눠야 하고 한 사람당 10여리터 이상은 얻어야 했는데 주변에서 감이 빼곡히 달린 감나무를 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감나무는 보통 아름드리 키가 큰 나무들이 많아 웬만한 실력의 경험자가 아니면 감을 따기도 쉽지 않다. 결국 충남 아산에서 동료가 마련해 온 감으로 즙을 내려 나눴다. 그때 물들인 원단으로 그동안 모자 수십 장과 옷도 만들었다. 자잘하게 남는 자투리들도 버리기 아까워 모아놓곤 소품을 만들 때마다 사용한다.
감물염, 500원짜리만한 땡감이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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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창에 들인 감물염에 철매염, 소목염으로 다양한 빛깔을 내 만든 남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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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숙 |
| 감은 500원짜리 동전 정도 크기일 때의 땡감을 주로 이용한다. 감나무는 종류도 다양한데 어떤 감나무의 감이 물들이는 염료로 썩 괜찮은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감에 따라 물들였을 때 원단에서 배어나오는 그 특유의 쾌적함은 경험으로도 익히 알기에 올해부터는 땡감의 선택을 쉽게 생각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감물염의 첫경험은 선생님과 함께였고, 작업장이 불편해 직접 내리지 못한 해에도 그 전 해에 내린 것으로 늘 충분했다. 지난해 추석 연휴엔, 감물염색만으로 인정받는 선배언니랑 담양에서 며칠을 함께 보내며 훈수까지 받아 올봄 전시회에 쓸 원단을 뿌듯하게 쌓았으니, 온전히 나만의 실력과 경험으로 감즙을 내리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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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가을에 물들인 감물원단들. 5월 전시회 때 유용하게 사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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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숙 |
| 감즙을 내리는 작업에 실력 운운할 것까지야 있을까마는, 내 경험으론 충분히 공감하는 이유가 있다. 감은 대체로 모두 물이 든다. 단순하게는 진하고 여린 것의 차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염색을 업으로 하고, 물들인 것으로 무언가 만들어 세상 밖으로 내놓아 그걸 상품으로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일에 있어서 그 농도의 차이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정련이 잘된 원단에 스며들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보름 이상 햇볕과 마주해야 한다. 많은 양의 원단을 아침마다 감즙에 적시느라 번갈아 갈아대고, 바짝 마르면 하루에도 몇 회씩 반복할 수밖에 없는 정성과 수고로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볕이 닿는 부분에 따라 얼룩이 되기도 하고 일부러 그렇게 하여 무늬를 얻기도 하지만, 초보 때는 여간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니라서 바람이 심해 접힌 부분은 없는가, 비라도 내릴까 노심초사하며 하늘만 바라보던 날들도 많았다.
등산복 보다 좋은 감물염색 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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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회 3일 전 탄생, 첫날 시집보낸 4색챙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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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숙 | 이젠 몇 해째 겪는다고 나만의 꾀와 요령이 늘어간다. 원액 그대로의 감즙을 내리려면 가정용 믹서나 녹즙기 정도로는 조금 불편하고 힘들다. 적은 양이라면 몰라도 감꼭지를 떼지 않은 채 즙을 내리는 나는 고춧가루 빻는 기계를 이용하여 조금 수월하게 작업한다.
흔히들 보는 감물염색은 붉은 기운을 띈 진한 밤색이다. 물을 섞지 않은 원액 그대로 물들여 제대로 발색시킨 경우의 감물원단 색이 보통 이렇다. 여기에 2~3일 지나 누리끼리한 빛깔로 발색되었을 때쯤 멈추고 거둬들이는 원단들도 일부러 만든다. 이 경우는 덜 발색시킨 감물염에 다른 염료를 물들여 내가 원하는 빛깔을 얻고 싶은 때다. 밑바탕은 이미 감물이 들었고, 겉으로 보이는 색은 소목의 붉음처럼, 오배자의 보랏빛(철매염)처럼, 먹물의 잿빛처럼 형형색색으로 드러난다. 일반면과 달리 무늬에서 다양함을 얻기 어려운 천연염색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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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색챙모자의 속살. 위로부터 면/인견(철매염)/면/인견(얼룩무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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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숙 |
| 요즘은 매달 한 번 나서는 동료들의 산행에 어떻게든 따라다니려고 기를 쓴다. 4월의 지리산 바래봉 산행의 경우 특별히 험한 코스는 없었으나 8시간 동안 슬렁슬렁 걸으며 바람과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는데, 햇볕을 막고 땀을 가라앉히며 내 머리를 감싸 준 것은 '감물인견'으로 만든 두건이었다.
5월, 대둔산의 험한 바윗길을 오르내리는 산행 내내 시원함으로 유쾌할 수 있었던 것은 밤새워 만들어 입은 원피스형의 '감물조끼' 덕분이었다. 조끼 안에는 또 감물인견 긴팔 블라우스를 입었으니 바지 빼고 허리벨트까지 모두 내 손으로 직접 만든 감물염색 원단들을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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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용 누빔 의류와 모자들. 구입한 누비원단에 손누빔으로 무늬 넣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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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숙 |
| 감물원단이 등산복의 기능을 웃도는 장점이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내가 입고 이 산 저 산 누려봐야 남에게도 자신 있게 큰소리칠 수 있을 테니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어 입고 갔어야 했다. 여름에 입을 맞춤한 등산 바지가 없으니 6월 산행에 맞추어 도톰한 감물원단으로 바지 하나 만들어 입을까?
이러다 겨울용까지 누벼 입겠다고 덤벼들라, 못 말리는 성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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