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염색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부산귀농학교 9기 동기였던 분인데 어느날 나에게 분홍빛 스카프를 선물했습니다.
자신이 물들인 거라면서....
분홍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그 분홍빛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날이 시작이었습니다.
둘 사이에 수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지요.
오늘 문득, 그분이 굉장히 보고싶네요. 참 고운 분이죠.
염색에 빠지면서 그 분이 나에게 준 글이 있었는데 천염염색을 너무나 잘 표현한 글이어서 소개합니다.
꼭 꼼꼼히 읽어두세요. 염색을 하게 되면서 절로 공감하게 될 겁니다.
사진은 제가 이번주에 한 염색스카프입니다.
마음의 빛깔
김경선
요즘들어
세상이 온통 아름다운 색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염색에 매료된 이후 제게 일어나고 있는
조금은 흥미로운 변화입니다.
사람에게 어떤 관심사가 있으면
세상의 모든 일이 그 관심사와 연결되어 보입니다.
아이들 눈에는 아이들만 보이고
임산부 눈에는 임산부만 보이듯
요즘의 제 눈에는 사물이 모두
염액을 추출하거나 염색할 대상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앞만 바라보고 걷던 제가
주변을 자주 두리번거리며 걷게되는
아주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꽃을 보아도 나무를 보아도
폐교의 무성한 잡초더미를 보아도
그 속에 숨어있을 미지의 색을 상상하며
온갖 나래를 다 펼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자연의 색 만큼이나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산을 바라보거나 들판을 바라보면
거기 어머니같고 고향같은 푸근함이 있습니다.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순수하게 만듭니다.
평소 화려하고 강렬한 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염색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강한 색이라 할지라도 전혀 거부감이 생기질 않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진달래빛으로 붉게 염색한 생활한복을
좋아라하며 열심히 입고다니는 것을 본 아들아이가
앞으론 어머니도 그렇게 좀 화사하게 입고 다니시라며 아주 반색을 합니다.
평상시의 침착한 단색옷들이 그동안 별로였다는 말로 들리기는 하지만
염색한 옷에 대한 칭찬이라 단정하고 엄마는 마냥 즐거워 합니다.
푸른 줄기에서 붉은 염액이 추출되거나
녹색 이파리에서 파아란 염액이 녹아나오기도 하는 이 신비로움 앞에서
저는 오직 감탄에 감탄을 더할 뿐입니다.
여러가지 매염제에 따라
염색된 천의 색상이 순식간에 변하기라도 할라치면
마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요술을 보는 듯 신기하기만 합니다.
동심으로 돌아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작업이
바로 염색이 아닌가 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도
그 이면에 숨어있는 아주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
그러한 진실을
저는 이 염색을 통해서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가을이 되어 들판의 풀이 짙어지고 열매가 여물어짐에 따라
거기서 추출한 염액 역시 짙어진다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보면서
사람이든 풀이든
깊어지고 여물어져야 좋을 존재인가도 싶습니다.
천을 물들인다는 것은
마음을 물들이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자연이란 염재 속에 풀어넣고
그 속에서 녹아나온 순수와 진실 그리고 열정들로
곱게 물들이는 일입니다.
그런 마음들이 모아지면
세상도 조금더 아름답게 물들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천연재료로 염색한 옷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탈색되어
서서히 본래의 색으로 돌아갑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불필요하게 덧씌워졌던 굴레와 체면
그리고 분별심 따위를 한꺼풀 한꺼풀 벗겨내고
본연의 마음자리를 찾아가는 일을
함께 떠올려봅니다.
염색된 천은 물과 햇볕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주지만
사람은 스스로가 그 본성을 돌이켜야 합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일은 달라 보이지가 않습니다.
자신의 고집스런 색을 벗겨내고
그대로 자연 속에 동화되어 살아갈 수만 있다면
거기에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에도
기다림이 필요없을 때란 없습니다.
염색을 하는 과정에서나
자신의 면목을 찾아가는 과정에서나
기다림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기다림이란
간절함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정성으로 생명을 가꾸고 수확을 기다리듯
김이 무럭무럭나는 염액 속에 천을 담그고 부지런히 손끝을 움직이면서
색상이 골고루 스며들도록 정성을 기울입니다.
이때도 단연 성질급한 사람이 불리합니다.
기다림은 곧 여유입니다.
여유가 없는 날은 염색조차 하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결론이
그래서 아직은 제게 유효합니다.
염색의 그 어느 과정에서도
은근과 끈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이 없습니다.
염색한 천을 햇볕에 널어말리며
결과를 기다리는 그 가슴두근거리는 순간에도
여전히 기다림이란 글자가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이제 얻게되는 염색의 결과가
오늘 내 마음의 반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여 아무런 군말없이 또 후회없이
그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염색한 스카프에 혹시라도 얼룩이 지면
그만 가슴 한켠이 찡해지고
오히려 더 소중하게 다루게 됩니다.
처음 얼룩을 대했을 때만큼
이제는 그렇게 속상하지가 않습니다.
사람사는 일에도
염색하는 일에도
엄밀한 의미에서 실패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이란 얼마나 믿을 게 못되는지
염색을 하면서 절감하곤 합니다.
첫눈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던 것도
한참 들여다 보고 있으면 괜찮아 보이기도 하고
마음 상태에 따라 어떤 날에 가서는
아, 너무나 고와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간사한 것이 사람의 눈이고 마음이지만
천은 아무런 생각도 분별도 짓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붉은 염료에 담그면 붉게 변하고
푸른 염료에 담그면 푸르게 변할 뿐입니다.
이런 무심을 저도 닮고 싶지만
그게또 그리 쉬운 일은 아닌가 봅니다.
마음 상태를 있는 그대로 잘 드러내어 주는 것은
함께 배우고 있는 바느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안정적일 때에는 바늘땀이 아주 고르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비뚤어진 한땀 한땀이
흐트러진 내 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여 바느질 삼매에 들지않는 날이라면
그만 조용히 돋보기를 내려놓는 편이 낫다는
또하나의 결론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취미가 있어 시작한 일이긴 하지만 이제 염색과 바느질은
순간을 점검하고 비추어내는 마음의 거울이 되어
제게는 하나의 수행이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요즘 제가 늘상 하는 말로
자발적 고행인 셈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기에 즐거울 수 있고
즐겁게 가는 길에는 보람이 있습니다.
손없는 손으로 마음의 거울을 닦고
함이 없는 함으로
자신의 길을 그저 묵묵히 걸어가는 것.
이것이
염색을 하면서.. 또 바느질을 하면서
제가 얻고픈 단 하나의 무심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나
조급함을 경계해야겠지요.
아마도 한 10년 쯤 하게 되면 어느정도 기술자가 될것이고
거기서 조금더 세월이 흐르면 '쟁이'가 될것이고
그리고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또 소리없이 흐르고 나면
그때는 별다른 생각없이도
몸과 마음을 온전히 쓸수있게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고픈
그 욕심마저 텅 비운 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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