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요리시간

느린 삶의 고장에서 맛보는 간장 명인의 손맛

아기 달맞이 2011. 12. 26. 07:51

모정소반의 건강한 한식 밥상


요즘 사람들은 간장 맛을 모른다. 맛을 모르니 쓸 줄도 몰라 일 년 가야 간장 한 병을 못 먹는다. 양조간장이 아닌 전통간장 얘기다. 소금은 간을 맞추는 것에서 끝나지만 간장으로는 간과 맛, 건강을 모두 챙길 수 있다. 잘 쓰는 간장은 보약에 다름 아니다.

'음식 맛은 장맛이 반'이라 했다. '입에 착착 붙는' 손맛이라는 것도 따지고 들면 간을 잘 맞추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간은 무엇으로 맞추나. 우선 소금과 간장이 만만하고 때에 따라 된장, 고추장, 젓갈 등을 섞어 쓰기도 한다. 음식 맛은 마지막 간을 어떻게 맞춰서 마무리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 [헬스조선]

간편하기로는 소금이 우선일 테지만 싱거움은 가시더라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부족한 그 무엇, 그렇다고 함부로 양조간장을 넣을 수 없는 노릇이다. 거무스름하게 음식 때깔이 죽어버릴뿐더러 들척지근한 잡맛이 돌아 음식 맛을 아예 망쳐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가난한 집 살림을 말할 때 '없는 집이라 간장 대신 소금으로 간을 한다'고 했다. 간장보다 소금을 아랫길로 쳤기 때문이다.

#1 직접 구운 죽염에 좋은 암반수를 써서 담그는 장맛


전남 담양은 사철 푸른 대숲의 고장이다. 담양군 창평면 고씨 종가의 양진제 10대 종부이자 한국전통식품 제35호 간장 명인인 기순도 씨는 음식할 때 전통 방식으로 담근 재래 간장만 사용한다. 맛있는 간장이 없을 때에야 소금을 쓸 일이지 간장 맛이 좋으면 구태여 소금으로 간을 맞출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이가 사는 창평면은 잘 알려진 대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이다. 슬로시티의 특징을 설명해 주는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전통음식인데, 창평 슬로시티 역시 오랜 세월 대를 물려 온 독특한 음식문화가 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기계문명이 발전해도 절대 흉내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손맛'이다. 창평 슬로시티에 이어져 내려온 '손맛'의 위력은 세 명의 명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각기 다른 분야에서 지정을 받은 40명의 명인이 있는데 창평은 그중에서 쌀엿·한과·간장 등 세 명의 명인을 보유했다. 기순도 명인이 운영하는 (주)고려전통식품은 특히 외지인이 많이 찾는 곳이다. 기순도 명인의 남편은 '일찍 죽을 명'을 타고 태어났다고 믿어 유독 건강한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찾아낸 건강식이 죽염이다. 집 근처 대밭에서 채취한 대나무에 부안에서 나는 천일염을 넣은 뒤 소나무 장작에 구워낸 죽염을 장복하며 건강을 챙겼다고 한다. 남편이 만든 죽염은 잡맛이 없으면서 단맛이 감돌아 간장과 된장을 담그면 짜지 않고 감칠맛이 난다는데, 그 맛을 본 지인의 권유에 의해 설립한 것이 고려전통식품이다.

"예전부터 이 집터가 장맛을 내는 데 최적의 장소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집 주변에 소나무가 유독 많아 봄마다 날리는 송홧가루가 장맛을 돋워 준다는 것이죠. 수치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그럴 만하다는 생각은 들어요. 장맛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잘 맞아떨어져야 좋아지는데 공기·물·햇빛이 가장 중요합니다. 좋은 물을 얻고 싶어 150m 아래까지 땅을 파 암반수를 끌어올려 썼더니 확실히 장맛이 더 좋아지더라고요."

#2 숙성 기간에 따라 달라지는 간장의 명칭과 용도


명인의 장독대 구경을 나섰다. 넓은 마당에 빼곡하게 들어찬 것은 오래전부터 수집해온 대독들. 늦가을 장독대에는 붉은 맨드라미가 피어 있어야 제맛이다. 한데 이 집에는 어른 무릎을 겨우 넘을 고추 포기들이 사이사이에 보인다. 따로 심지는 않았단다. 아마 간장 담글 때 마른 고추를 몇 개씩 띄우면서 흘린 고추씨가 떨어져 그렇게 싹이 텄는가 보다. 이유야 어떻든, 즉석에서 독 뚜껑 열어 된장이며 고추장을 맛볼 때 그 연한 고추가 참으로 요긴하다. 손님에게는 제법 유명해서 장독대에 들어서자마자 눈으로 고추 포기부터 찾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우선 손으로 찍어 맛보기에는 된장이나 고추장이 좋다. 그 자리에서 노란 속 된장을 퍼서 고추 찍어 맛을 본다. 명인이 직접 구운 죽염을 넣었다더니 그리 짜지 않으면서 된장답지 않게 칼칼한 맛이다. 찹쌀고추장 역시 개운하면서도 칼칼한데 생각보다 제법 맵다.

전남 영광에서 재배한 태양초를 일일이 눈으로 확인한 다음 직접 방앗간으로 가져다 빻아 쓴다고 한다. 명인이 자그마한 독 뚜껑을 열더니 조심스레 부른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360년 된 '씨간장' 독이다. 이전까지는 본 적 없을 만큼 까만 간장이다. 독 안에 넣어둔 바가지도 새까맣게 물들었다. 귀한 장을 몇 방울 손바닥에 받아 맛을 본다. 간장 특유의 향은 오히려 덜한데 묵직한 맛이 느껴진다. 밀도의 차이라고 할까?

씨간장은 말 그대로 근본이 되는 간장이다. 수분이 날아가 양이 줄어든 만큼 햇간장을 부어 늘 같은 양을 유지하는 것이다. 명인은 해마다 새 간장을 넣지 않고 2~3년에 한 번씩 양을 보탠다고 한다. 종가의 비법대로 전해 내려온 간장인데, 특별히 제사나 명절에만 조금씩 꺼내 쓴다.

전통 간장은 숙성 기간에 따라 부르는 명칭과 쓰이는 용도가 다르다. 맛과 색의 차이 때문이다. 담근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맑은 간장은 '청장'이라고 부른다. 맛이 진하지 않아 미역국이나 뭇국처럼 담백한 맛을 내는 음식에 주로 쓴다. 예전 어머니들은 새로 담근 간장에 맛이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을 때 아무것도 넣지 않은 미역국을 끓였다. 냄새 없이 구수하게 국물 맛이 돌면 비로소 새로 뜬 간장을 먹었다. 2~3년 숙성시킨 간장은 떠오르는 거품을 걷어 가며 잘 다려서 맑게 거른 다음 나물이나 찌개 같은 일상 반찬을 만드는 데 쓴다. 어떤 음식에나 두루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5년 이상 숙성시켜 진득해진 간장은 '진장'이라고 부른다. 거무스름한 색이 살아야 더 좋으며, 약식이나 깊은 맛을 내야 하는 갈비찜이나 불고기 등에 어울린다.

#3 간장을 잘 쓰면 음식 맛이 달다


점심상에 내온 콩나물국을 보니 국물이 검은 것이 낯설다. 역시나, 간장으로 간을 맞췄다고 한다. 원래는 청장으로 해야 맑은 국이 되련만 어쩌다 보니 좀 묵은 간장을 떴다는 것이다. 다른 맛내기 재료를 넣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국물에 감칠맛이 돈다.
남도 밥상에 으레 오르기 마련인 묵은지와 갓김치 맛도 색다르다. 아삭아삭한 맛은 그대로 살아 있는데 맛이 개운해 따끈한 밥 위에 얹어 먹으면 다른 반찬이 생각 나지 않는다. 젓갈 대신 간장을 넣어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명인이 담그는 김치는 빨리 시지 않는다고 한다. 젓갈은 김치 맛을 돋우는 기능을 하지만 초기 발효숙성을 돕는 역할도 한다. 젓갈을 넣지 않으니 익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맛이 들면 그 상태 그대로 오래 지속된다. 밤과 당근을 모양내서 깎아 넣은 갈비찜 역시 단맛이 강하다. 꿀이나 설탕을 넣었을 리 만무하다. 양조간장도 넣지 않았다. 집에는 아예 양조간장이 없다. 그런데 달다.

5년 묵힌 진장 덕분이다. 재래간장을 넣으면 냄새가 날 거라는 편견을 버려야 음식 솜씨가 좋아진다는 것이 명인의 얘기다. 간장이 잘못되면 냄새가 나는데 맛있는 간장은 향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요리에 사용할 수 있다.

"예부터 부잣집 음식이 맛있다는 얘기가 있어요. 살아 보니 그게 일리가 있다 싶은 게, 같은 음식이라도 한꺼번에 많이 만들면 더 맛있는 법이니까. 우리 집 장맛도 예전에 갓 시집와서 시어머니와 담그던 장보다 지금 담그는 장맛이 더 좋아요. 찾는 사람이 많아 워낙 많은 양을 담그니까요. 아마 옛날 천석꾼, 만석꾼집 장보다 지금 제가 담그는 장맛이 더좋지 않을까요?"

#4 양념간장을 더한 특별한 음식, 전


명인의 밥상에서 독특한 음식 두 가지를 만났다. 바로 죽순전과 고추전. 모양 그래로 살려 길게 부친 죽순전을 먹기 좋게 자르고 나니 포를 잘 떠 부친 대구전이나 민어전이 떠오른다. 하지만 막상 먹어본 죽순전은 오돌오돌 씹히는 것이 씹을수록 배어나오는 뒷맛이 진득하다. 비결은 밑간이다. 마늘과 참기름, 청장을 넣어서 조물조물 무쳐 죽순에 밑간한 다음 밀가루와 달걀물을 차례대로 씌워 부친다.

곡성이 고향인 명인은 어려서부터 죽순을 먹고 컸다. 마침 집 근처에 대밭이 천지라 죽순만큼은 아쉬움 없이 1년 내내 먹을 수 있다.

"죽순은 삶아서 냉동하거나 소금에 절이는 염장법을 써서 보관합니다. 냉동한 것을 쓸 때는 언 채로 끓는 물에 넣어 한 번 삶아야 아삭아삭하지요. 녹여서 데치면 물이 빠지면서 질겨지거든요. 항아리에 절여놓은 죽순은 흐르는 물에 담가 짠 기를 잘 빼면 햇것과 맛의 차이가 거의 안 나고요."

고추전 역시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형태다. 먹어보니 기름기가 전혀 묻어나지 않고 맛이 담백하다. 알고보니 부치지 않고 굽는단다. 쫄깃쫄깃 씹히는 맛도 특이하다. 명인이 어린 시절부터 먹어 왔던 음식이라고 하는데, 입맛 없을 때 한두 개 구워 먹으면 잃었던 입맛을 단번에 되돌려 준다.

"고추는 가운데를 갈라서 양념간장을 묻혀 대꼬챙이에 열 개 정도 나란히 꿴 다음 숯불에 한 번 구워요. 그리고 간장으로 간을 맞춰 꺼룩하게 만든 밀가루 반죽을 앞뒤로 바른 다음 다시 숯불에 굽죠. 먹을 때 참기름을 조금 바르는 것 외에는 일절 기름을 쓰지 않으니 담백할 수밖에요. 손님상에 내려면 고추를 반으로 갈라 그 안에 간 쇠고기에 간장양념을 해서 무쳐 넣어도 맛있어요."

고추전은 물에 만 밥 위에 얹어 먹어도 될 만큼 개운해 밑반찬으로 두고 먹으면 좋겠다. 매운 고추와 맵지 않은 고추를 엇갈리게 꿰어 구워 먹어도 좋다.

명인이 한 해에 사용하는 콩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40kg 콩이 1000가마 이상은 족히 된다고 한다. 11월에 들어서면 그 많은 콩을 삶아 직접 메주를 만들고 황토로 지은 발효실에서 정성껏 띄운다. 이듬해 음력 정월이 되면 하루도 쉴 틈 없이 부지런히 장을 담근다. 봄이 무르익는 4월 중순 무렵 된장과 간장으로 장을 갈라 독에 넣고 나면 한숨 돌리는데, 이후로는 날씨를 보아 가며 세심하게 장을 돌본다.

간장 맛의 비결은 대량으로 장을 담그는데다 독마다 메주양을 많이 잡아 진하게 담그는 것, 그리고 일반 소금 대신 죽염을 써서 같은 염도라도 맛이 순하게 하는 것을 꼽았다. 국이나 찌개의 뒷맛이 심심하다 싶을 때, 나물 맛이 뭔가 허전하다 싶을 때, 그동안 해왔듯 소금통을 집어 드는 대신 간장을 한 숟가락 넣어 보는 것이 어떨는지. 알고 보면 너무 쉬운 고수의 맛 비결이 간장 한 숟가락에 담겨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