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음미하며 삶의 미학과 만나죠"
사진기자 출신 茶人 김동현씨 전원주택 '雲中月' 이야기
▲ 사진 위부터 운중월전경·차실·수집한 찻 그릇·김동현씨가 만든 등잔대. 그는 등잔, 등잔대 전시를 3회나 가진 작가이기도 하다./ 변희석기자
30여년 전. 신문사 사진기자 다섯 명이 모였다. 이들은 “지금은 하루하루 쫓기듯 살아가는 처지지만 언젠간 시골로 내려가 텃밭을 일구며 살겠다”고 의기투합했다.
시간이 흘러, 한명은 북한의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숨졌고 다른 한명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은 이중 두 명은 예전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지난 98년 퇴직하자마자 둘은 수중에 남아있는 돈으로 사들일 수 있는 땅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서울부터 시작한 장래 전원주택 ‘후보지’는 어느덧 충북까지 내려왔다. 땅을 사기엔 이들이 가진 돈이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국 충북 음성군 생극면 생3리에 자리를 잡았다. 전원 생활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결국 한 사람은 서울로 돌아갔다.
그렇게 해서 남은 사람이, 신문사 사진부장을 끝으로 퇴직한 김동현(57)씨다. 사람들은 그가 살고 있는 집을 ‘운중월(雲中月)’이라고 부른다. 사방을 산이 감싸고 있고 눈 앞에는 텃밭이 펼쳐져 있다. 그는 이 집을 직접 설계했다. 뜰에는 묘목을 심었고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 집 앞에는 작은 우편함도 세웠다. 그는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도기(陶器)를 만들고 차(茶)를 마신다.
말 그대로 그는 도인(道人)처럼 산다. 집과 텃밭을 가꾸며 온종일 몸을 움직이는 것만도 바쁜데 이곳엔 그를 만나러 전국 각지에서 온 낯선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다. 지역 문화계 인사 사이에선 “운중월 안 가봤으면 문화인이 아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다. 그런데 정작 그는 “오는 사람은 맞겠지만, 이 곳이 뭐 대단한 곳이 아니다”라는 표정이다
.
지난 7일 이곳을 찾아 세찬 비바람이 뽀얗게 물안개를 일으키는 길을 달렸다. 생극면 읍내의 ‘근대화 연쇄점’과 ‘명랑 이발관’, ‘호수 다방’을 지나 ‘운중월’에 닿았을 땐 세찬 비바람 속에 집이 잠겨 있었다. 마당에선 비에 젖은 풍산개가 온 몸을 털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흙으로 빚은 등잔이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모두 그가 손수 만든 것들이다.
그는 지난 83년 인사동에서 등잔을 주제로 전시회를 열기도 한 ‘전문’ 도예가이기도 하다. “전시회 여는 첫날, 공교롭게도 지방 출장이 잡혔어요. 다녀와보니까 사람들이 제 작품의 30%를 운보 김기창 화백이 사들였다고 하대요. 곧 소문이 나서 날개돋친 듯 작품이 팔려나갔어요. 황학동 시장에서 제 작품이 ‘옛날’ 물건으로 둔갑해 팔렸다는 소문까지 돌더군요.”
70년대 중반 신문사 사진기자 시절.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누비며 취재하고 술로 날을 지샌 다음 다음날 새벽같이 출근하는 게 일과였다. 자연스럽게 몸이 망가졌다. 그래서 숙취효과가 있다는 차(茶)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약(藥) 대신 마셨는데 그는 ‘의외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밤 12시에 퇴근해 촛불 켜고 혼자 차를 마실 정도가 됐다고 한다.
그는 “느긋하게 차를 즐기다 보면 모든 미학적 요소와 만나게 된다”는 어려운 말로 설명을 대신했다. 차를 담는 그릇과 다기를 놓는 차상에서 시작해, 차를 마시면서 들리는 물소리와 풍경에 눈을 돌리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3년째 ‘차인’이라는 잡지에 ‘차와 도자기’를 연재하고 있기도 하다. ‘잎차 마시기의 역사’, ‘차맛의 구성’과 ‘차우리개’ 등 그의 글을 보면 차에 관한 한 취미의 경지를 넘어선다.
“차(茶)는 생각할 시간을 줘요. 차를 마시다보면 옛스러운 호롱불에 불 밝히고 마시고 싶어지고, 그림 한 점 걸어놓고 감상하고 싶어지죠. 그래서 흙으로 등잔을 만들었고, 아름다운 곳에서 차를 즐기고 싶어 이곳까지 오게 된 겁니다.”
차상, 차 숟가락, 등잔대 등 다실을 꾸미는 데 필요한 여러가지 소품들이 그의 손 끝에서 나온다. 그렇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 이제 ‘운중월’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그가 만든 질박한 그릇과 등잔대는 이 집의 일부다. ‘운중월’의 천정은 무려 7m 높이. 한 구석에서는 시냇물 소리가 졸졸 들린다. 방도 따로 없이 모든 공간이 하나다. 집 안에 앉아 있으면 산 속에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이곳의 이야기가 알려진 것은 지난 2001년 지역신문에 소개되면서부터. “버릴 데가 없어 TV를 마당에 뒀더니, 설치미술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전원주택 ‘운중월’이라는 기사가 실렸더라구요.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좀 황당했죠.” 이후 알음알음으로 이곳을 찾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일주일에 수십명이 될 때도 있다. 객(客) 대부분은 차와 도자기, 그림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지난달 말 직장에서 수묵화를 그리는 동호회 ‘청풍회’ 회원 8명이 다녀갔다. 그림 그릴 마땅한 장소를 찾고 있던 이들 회원들은 이곳에서 하룻밤 묵으며 수묵화를 그렸다. 숙박비를 받지 않겠다는 주인장에게 이들은 ‘운중월’을 그린 수묵화 한 점을 두고 갔다. 이제 수묵화는 이 집 한 구석에 위풍당당하게 걸려 있다. 그는 아내의 사진을 걸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도 ‘이혼남’이냐고 물어봐서 아예 사진을 걸어뒀어요. 아내가 집안 사정상 용인 수지에 사는데, 한 달에 일주일쯤 이 곳에서 머물고 가지요. 1~2년쯤 뒤에 아내도 이곳에 합류할 겁니다.”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사방에 빗소리가 가득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빗소리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울렸다. 어디선가 아기 우는 소리도 났다. 집이 완성되면서 흙 위에서 잠을 청할 정도로 행복했지만, 사실 무섭기도 했단다. 낮에는 조용하던 산(山)은 밤이 되면 싱싱하게 되살아나 온갖 소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조용히 차를 음미하며 “두려움은 무지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밤새 들리던 애기 우는 소리는, 새소리였어요.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지붕의 비닐이 벗겨져 창문 때리는 소리였구요. 알고 보니 어찌나 시시하던지. 정작 힘든 건, 생각보다 잔일이 많다는 거죠.”
그는 걱정스러운 듯 집 앞의 텃밭을 내다봤다. 며칠 전 심은 고추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소박한 생활’에 대한 동경도 좋지만 그 생활을 몸소 실천하는 데는 의지가 꽤 필요하다면서 그는 우산을 쓰고 밭으로 나섰다.
(박민선기자 sunrise@chosun.com ) 2003.05.10 10:21 26'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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