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농촌행을 결심한다는 것은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다. 김철희 씨가 동경하던 전원생활을 실천하기까지는 남편을 믿고 응원해준 아내 배인숙 씨의 도움이 컸다. 김씨 부부는 김해시 무척산 기슭에서 스스로 ‘장하다’고 자부하며 아름다운 자연의 색을 뽑아내고 있다.
“물을 것 있으면 나한테 물으세요. 이 사람 딴 데 신경 쓰면 훌륭한 작품이 안 나옵니다.”
염색에 매진하고 있는 남편을 배려하는 마음에서인지, 애써 자신이 남편의 대변인임을 강조하는 배인숙 씨(47). 그 말에, 황토물에 담긴 천을 주무르고 있던 남편 김철희 씨(52)가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대며 웃는다.
김씨 부부가 김해시 생림면 무척산(703m) 기슭에 둥지를 틀고 천연염색 작업장인 ‘참빛천연염색’을 차린 것은 2003년 12월이다. 2000년 귀농해 전국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대도시인 부산에서 그다지 멀지 않으면서도 시골의 모습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곳에 정착한 것이다.
다른 귀농인들과는 달리, 김씨 부부는 부부가 함께 귀농학교를 수료했다. 2000년 부산귀농학교를 5기로 졸업했는데, 함께 귀농학교를 다닌 것은 귀농에 대한 서로의 시각을 맞춰 좀더 알찬 농촌 생활을 꾸리고 싶었던 까닭에서다.
차별화된 색을 창조해내는 사람들
생계 수단으로서 염색을 선택한 것은 김씨가 부산에서 화학 회사에 다녔기에 염색이 이뤄지는 과정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던 데다가 힘든 농사일보다는 접근이 쉬웠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김씨 부부는 귀농 3∼4년 전부터 전국의 염색가들을 찾아다녔으며, 복장학원에서 수강하며 침구류, 옷 등을 만드는 기술을 익혀왔다.
“둘 다 전원생활을 꿈꿔왔으나 접근 방식은 너무 달랐어요. 경남 산청이 고향인 나는 시골 사는 맛을 아는데 비해, 부산 시내가 고향인 남편은 막연히 동경만 해왔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한 남편은 식구들 먹여 살릴 일이 걱정되는지 선뜻 용기를 못 내더라고요. 그때 내가 망설이고 있는 남편을 도와줬지요. 20년 가족을 위해 살아왔으니 이제는 당신 행복을 위해 살아보라고요.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가자고 반강제적으로 권유했습니다. 물론 막상 그만둘 당시에는 나도 눈앞이 캄캄했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열심히 하다 보니 이렇게 잘 정착을 했습니다. 우리 남편 정말 장합니다.”
이 과정에서 힘들었던 것은 아이들 문제였다. 귀농 당시 딸 양경(24)이는 대학생이라 별 문제가 안됐지만 아들 봉균(21)이는 고등학교 1학년 때라 한창 예민하고 바쁠 시기였던 것이다. 결국 배씨가 김해(당시에는 김해시 진례면에 살 때였음)와 부산을 출퇴근하며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아이들도 시골로 간 부모님을 자랑스러워하는 김씨 부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양경이는 일본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며 부모님의 일에 동참할 준비를 하고 있다.
김씨 부부에 대해 염색계에서는 ‘차별화된 색을 창조해내는 사람들’이라고 호평하고 있다. 이것은 화학 쪽에서 일해온 노하우를 천연염색에 잘 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화학에서의 변화를 자연의 방법으로 실현한 것이다.
참빛천연염색에서 만드는 제품은 의복, 침구류 등 다양하다. 김씨 부부가 특별히 좋아하는 소재는 황토 염색. 미세한 황토가 천에 박혀서 은은한 색을 만들어내는 묘미는 가히 매력 만점이다. 그 외 식물 염료 염색은 감·밤·홍화·치자·쪽 등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들을 사용한다.
마무리 때 코팅제를 처리하면 염색이 오래가지만, 코팅은 전혀 하지 않는다. 비생태적이기 때문이다. 황토 염색 제품의 경우 오래 사용하면 물이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김씨는 환경을 해치지 않도록 매염제도 최소화하며, 매염 처리를 하지 않고 염색하는 방법도 연구 중이다.
제품의 가격은 스카프 1만∼4만 원, 베개 3만5000∼5만 원 선이며, 옷은 생활한복 한 벌을 10만 원 대에 내놓고 있다. 이 금액은 다른 천염염색 제품들과 비교했을 때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가격이다. 예전에는 시골에서 누구나 만들어 입던 것을 특별히 취급할 이유가 없다는 게 김씨 부부의 지론이다. 서민들도 쉽게 입을 수 있게 적당한 값만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판매는 주로 입소문을 듣고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해 이뤄지며, 대형할인매장인 홈플러스 김해점에도 입점해 있다.
염색 작업은 모두 둘이서 한다. 다른 직원을 쓸 계획도 없고 대량으로 생산할 생각도 없다. 돈에 마음이 가 있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제품 생산 외에, 김씨 부부는 천연염색 체험장도 운영하고 있다. 연간 2000명 가량 참여하며, 주로 주말을 이용해 학교·학원·사회단체 등 다양한 모임에서 찾아온다. 참빛천연염색은 부산귀농학교의 체험장으로도 활용되는데, 김씨는 2002년부터 부산귀농학교의 염색 과정 강의도 맡고 있다.
염색에만 매달려온 지 6년째. 지금까지는 텃밭에서 푸성귀 정도만 가꿔먹었는데, 올해부터는 농사도 시작해볼 계획이다. 녹차에도 관심이 많은 김씨 부부는 김해 지역의 전통차인 ‘장군차’를 재배하기 위해 이미 씨도 준비해뒀다.
귀농 이후 더 돈독해진 부부 관계
“대만족입니다. 중간에 고생도 많았지만, 귀농 전 꿈꿨던 삶을 조금씩 이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골 경험이라고는 가끔 처가에 가는 것이 전부였던 내가 어엿한 농부가 된 것도 만족스럽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하루 일과 후 김씨 부부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집에 텔레비전이 네 대나 있지만 귀농 이후 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염색 이야기, 농촌 살이 이야기, 농사 이야기 등 나눠야 할 얘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씨 부부는 귀농 이후 부부 관계가 더 돈독해졌다.
귀농학교 동기들 모임에도 주도적으로 참석한다. 부산귀농학교 5기의 경우 단합이 잘 되는 기수로 유명한데, 친목은 물론 정보 교환, 종자 나누기 등 교류가 아주 활발하다.
아내 배씨는 요즘 마케팅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장인 정신으로 무장한 남편이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널리 알리지 않으면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컴맹이지만 컴퓨터도 공부해 홈페이지도 만들 계획이다.
당당함은 삶의 자신감에서 나온다. 따뜻한 봄날 오후, 염색한 천을 펴서 빨랫줄에 널고 있는 김씨 부부. 무척산을 넘어온 봄바람은 금방 천을 보송보송하게 말려줄 것이다. 이리저리 날리는 천을 따라 김씨 부부의 손놀림도 경쾌하다. 알록달록 예쁘게 물든 천 사이를 오가고 있는 김씨 부부는 서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로 살고 있다. 문의 0553374421
글·이승환 차장 | 사진·최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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