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방

책거리 음식

아기 달맞이 2011. 11. 30. 17:40

-->
민화는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꾸밈없이 살아온 서민의 삶 속에서 태어난 민화는 옛사람들의 주거 공간을 꾸미던 것으로, 우리가 지나온 삶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지요. 민화 중에서도 색조의 조화가 아름다워 가장 가치가 높은 것이 책거리입니다. 책거리가 신비롭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삶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그 속에는 행복을 상징하는 물건과 음식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복을 받아 오래 살면서 행복하고자 하는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인간 본연의 심성이요, 믿음이니까요. 또 책거리는 옛날 서당에서 학동들이 책 한 권을 다 배웠을 때 간단한 음식과 술을 장만해 훈장에게 대접하는 일을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책씻이 또는 책례라 하며 스승에 대한 감사와 공부하는 학동의 노고를 치하하는 옛 풍습이지요. 동지가 지나면 푸성귀도 새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책거리’ 민화 속 길상을 상징하는 음식과 책 한 권을 떼었을 때 자축하며 즐기던 음식으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어떨까요. 책거리에는 풍습과 함께 음식이 담겨 있고, 그 음식에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책거리 속 음식과 함께 책씻이를 하듯 묵은 때를 훌훌 벗겨내고, 행복을 기원하는 음식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다
우리 선조들은 서당에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 <소학> 등 책 한 권을 다 배우고 나면 훈장한테 음식을 차려 대접했습니다. 훈장의 노고에 보답하고 학동의 공부를 더욱 격려하기 위한 것이지요. 이것을 ‘책거리’라고 하는데 세책례洗冊禮, 책례冊禮 또는 책씻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반드시 떡을 만들었지요. 깨나 팥·콩 등으로 만든 소를 꽉 채운 송편이 대표적으로, 학문도 그렇게 꽉 채우라는 소망을 담았습니다. 주로 오색 송편이나 꽃떡을 빚었지요. 오색 송편은 우주 만물을 형성하는 원기와 오행에 근거해 자연에서 얻은 식재료로 색을 곱게 들여 만물의 조화를 나타냈습니다. 음양이 조화를 이룬 것으로, 인체의 오장육부를 다스리고, 마음에 기운이 가득 차오르게 한다고 믿었지요. 속이 비어 뚫린 송편을 빚기도 했는데, 학동의 지혜 구멍이 송편처럼 뻥 뚫리라는 염원을 담은 것입니다.



청렴한 선비 정신을 그리다
조선의 임금 중에서도 늘 책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정조입니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즐겨 해 항상 책 속에 파묻혀 살았던 그는 어좌 뒤에도 책거리 병풍을 보란 듯이 쳐놓았다고 합니다.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는 자세를 강조하고, 통속적 주제로 치우치는 ‘병든 글’을 비판하는 뜻에서 책거리를 아끼던 정조 덕분에, 양반들 사이에서는 책으로만 가득 찬 책가도 병풍으로 벽을 치장하는 것이 유행했다지요. 선비들의 사랑방이나 서재를 장식하던 당시의 책거리는 고매한 학덕을 쌓기 위해 애쓰는 문인들의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글 읽기를 즐기고 학문의 길을 추구하던 당시 조선시대 선비들의 일상생활상을 엿볼 수 있지요. 음식 중에서도 청렴결백한 선비를 닮은 신성한 음식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새해를 맞이하는 떡인 절편입니다. 특히 절편을 얇게 민 새하얀 박병은 선비들의 애장물인 책과 종이를 꼭 빼닮았지요. 약간의 아이디어만 더하면 변화무쌍한 떡이 절편입니다. 떡살로 찍어내 모양 절편을 만들어 소망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고, 박병 위에 문양을 살짝 찍어 다양한 가루를 고루 바르면 선비가 염원을 담아 한지 위에 그린 한 폭의 그림 같지요.

학문에 대한 염원을 담다
매년 겨울 제주도에서 귤을 진상하면, 임금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귤을 나누어주고 글제를 내려 시험을 치르게 했습니다. 이를테면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특별 시험 같은 것이지요. 지금은 흔해서 귀한 줄 모르지만, 귤은 껍질에도 비타민이 풍부해 버릴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단자는 잘 굳지 않아서 예부터 선물할 때 많이 쓴 찹쌀떡으로, 특히 귤단자는 그 자태가 고운 데다 오방색의 중심 색인 황색을 띠어 안정과 에너지를 상징합니다. 기운을 북돋아주는 음식이니 고된 학문을 탐구하는 길에 귤단자만 한 영양제가 있을까요.



부와 명예에 대한 염원을 표현하다
책가도는 책으로만 가득 찬 것인 있는 반면, 책거리에는 책과 더불어 학문과는 상관없는 듯한 기물로 가득 찬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조선 상류층의 속내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책거리 속에 놓인 물건과 음식 하나하나에는 부와 명예에 대한 욕심을 숨길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책거리에는 서가에 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자기, 청동기, 향로 세트, 문방구, 차제구 등이 가득한데 대부분은 ‘메이드 인 차이나’입니다. 중국제가 부를 상징하던 시대이니 중국 문물에 대한 동경과 학문에 대한 애착이 만나 이루어진 조선 후기에 유행하던 풍경이지요. 갖고자 소망하는 것들을 책거리 속에 그려 넣듯이 제철이 아니거나 먹을 수 없는 것, 귀한 음식을 모양으로 만들어 즐기기도 했는데, 그것이 다식입니다. 특히 장수를 상징하는 잉어, 선비의 고결함을 상징하는 매화, 부부간의 금실로 가정의 화목을 상징하는 나비, 복福을 기원하는 기하학적 문양 등이 예나 지금이나 흔히 쓰는 것들입니다.




(왼쪽) 출세를 꿈꾸다
책거리에는 연밥이 자주 등장합니다. 새가 연밥을 쪼는 등의 모양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연밥은 합격을 상징하는데, 아들을 많이 낳고 공부도 많이 시켜 출세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지요. 연근은 약재로 사용할 정도로 영양분이 많습니다. 심장, 신장, 비장, 위 등을 보하며 신경까지 진정시켜주었으니
몸을 튼튼하게 해주는 강장제로서 연근정과와 연근약밥을 간식으로 준다면 학문에 매진해야 할 자식에게 이만한 보약도 없지요.


(오른쪽) 다산多産을 소망하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책거리 소재는 보다 광범위해져 구복求福을 상징하는 물건이 많이 나타납니다. 책과 관련 없는 족두리, 노리개까지 한데 모아 염원을 표현했지요. 그 간절한 소망은 바로 다산多産입니다. 이때 빠지지 않는 것이 식재료로, 석류·오이·고추·불수감·딸기 등이 다산의 상징입니다. 특히 석류는 예부터 ‘생명의 과일’ ‘지혜의 과일’이라 불리며 귀한 대접을 받았지요. 속에 알갱이가 1백 개가 들어 있어 백자유白子榴, 빨간 보석을 간직한 비단 주머니 같다 하여 사금대沙金袋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절세미인 양귀비가 매일 반쪽씩 먹었다는데, 씨 속에 에스트로겐이 풍부해 여성에게 더없이 좋지요. 백설기 위에 올려 먹으면 그 맛이 색다릅니다. 씨가 많은 오이도 다산을 소망하는 소재인데, 정과로도 즐겼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