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다례를 설명하기 전에 우선 규방다례의 단어 구성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규방(閨房)'의 사전적 풀이는 '부녀자가 거처하는 방'이다.
그리고 '다례(茶禮)'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전들에서는 '차례(茶禮)'와 같은 말이라며 '
명절이나 조상의 생일, 또는 음력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등의 낮에 간단하게 지내는 제사'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다례'는 '차(茶)' 다루는 법과 관계되는
제반 다사법(茶事法) 및 이에 수반되는 예의범절과 마음가짐까지를 포괄하는 말로 정의할 수 있다.
규방다례는 결국 위에서 설명한 단어의 의미와 같이, 부녀자들이 방에서 행하는 차를 다루는 법과 제반 다반사를 의미한다.
규방문화에 대한 논의는 조선시대에만 국한해 설명하기 쉬우나, 남자와 여자의 할 일이 엄격하게 나눠져 있던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집안살림을 도맡아 했던 아낙네들이 주로 바깥일을 하던 남편들을 내조하면서 집안의 경조사를 주관했는데,
아낙네들의 바깥 출입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었던 시기에 자연스럽게 생성되어
꽃피운 우리나라의 고유문화가 바로 규방문화인 것이다.
특히 유교사상을 중시했던 조선의 경우
아내는 반드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여필종부(女必從夫)와,
아내를 내쫓는 이유가 되는 일곱 가지 사항을 열거한 칠거지악(七去之惡) 등을 내세우며 여성들의 행동과 사상을 규제했다.
규방다례의 발전은 당시 시대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을 뜻하는 가부장제(家父長制)를 바탕으로 한 사회문화 체계는
17-18세기의 조선시대에 두드러지게 된다.
이때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대외적으로도 힘들었고,
대내적으로도 봉건질서의 심각한 혼란을 안정시켜야 하는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므로 여성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불평등구조의 가부장제 질서를 통해서,
기존의 신분체계·정치·경제구조를 유지·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가족주의로 미화되기도 하면서 보편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 뿌리 내리게 되었다.
조선조의 여성들은 공식적인 대표권이나 자격 면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계혈통이 절대화해 갔다.
이러한 부계혈통 체제의 경직화와 가문 중시의 현상에 따라 여성의 삶에 대한 통제가 심해졌다.
그 통제의 성격은 비인간적 수준이었다.
'열녀관'과 '재가 금지' 그리고 '출가외인'의 이데올로기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여성은 남편을 위하여 수절하고,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장려되었다.
또한 친정으로부터는 출가외인으로 철저히 배제되었다.
결국 여성은 남편 가문의 혈통을 잇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삼고
시집에 충성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가능성도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유교적 가부장제의 핵심적 이데올로기는 '여성에게는 세 가지 좇아야 할 도리가 있으니
집에서는 아버지를 좇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좇고, 남편이 죽거든 아들을 좇아
잠깐도 감히 스스로 이룰 수 없다'라고 하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이다.
여성이 남성과 관계를 맺지 못하면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없는 게 명백하다.
내훈(內訓)에서 역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길만이 여자의 도리로 제시되었다.
또한 자신의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시집살이를 견디어 나갈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했던 당시의 사회조건은,
칠거지악의 처벌조항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한편 조선조 사회가 도덕적 인간상을 표방한 만큼 여성은 '열녀'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남녀가 동등하게 조상으로서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또한 상류층의 경우, 혈통을 중시한 까닭에 어머니로서의 혈통 역시 여성의 지위를 받쳐 주는 주요 요건으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경직된 가족생활 규범에서 제외된 여성의 삶,
예를 들면 아들을 못 낳은 여자, 남편을 잃은 여자, 그리고 이혼이 없는 세상에서 소박맞은 여자, 이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태종 4년 6월에는 여자들이 평교자(平轎子)가 아닌 지붕이 있는 옥교자(玉轎子)를 타도록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뚜껑이 없는 가마를 타게 되면, 가마꾼들과 옷깃이 닿고 어깨를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여자들이 출입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게 하는 장치가, 여기에서부터 비롯되기 시작하여
후대로 갈수록 강화된 것이다. 남자들이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서 이리 오너라 하는 것도 다 내외법이 강화된 결과인 셈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선비 가문의 부녀로서 산간이나 물가에서 놀이나 잔치를 하고 야제나 산천 성황의 사묘제(祠廟祭)를 직접 지낸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명시되어, 그 규제를 어긴 자에게는 곤장 일백 대의 형벌이 가해졌다.
전통 가옥 구조가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있으며 서로 바라볼 수 없게 격리되어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남자는 밖에 거하고 안에 들어와 이야기하지 않아야 하며,
여자는 안에 거하고 밖에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여자는 제 고장 장날을 몰라야 팔자가 좋다'는 속담대로
안방에만 들어앉아 세상사와는 격리되는 것이 이상적인 여자인 줄 알고 있었다.
남편은 부인과 침실만을 같이하면서 식탁은 같이하지 않는다.
여자와 아이와 이야기하는 자체를 권위의 손상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러므로 부인은 남편을'사랑양반'또는 '바깥주인'이라고 호칭하고, 남편은 부인을 '내자'또는 '안사람' '아낙네'라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녀의 격리된 생활을 '내외한다'고 칭한다.
얼마 전까지도 시골에서는 여자아이를 도시에 보내면 남녀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그 여자아이는 '버리게 된다'고까지 여겼다.
그래서 조선조 여성들은, 특히 사대부층의 귀부인들은 얼굴을 외간 남자에게 보이지 않도록 너울이나 장옷을 썼다.
너울은 둥근 모자 모양에 긴 자루 모양의 천을 이어 붙여 머리에 쓰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얼굴에 걸치는 부분은 앞을 투시해 내다볼 수 있는 정도의 얇은 천을 대었다. 청색이나 흑색을 주로 썼다.
신분이 높을수록 너울을 길게 늘어뜨려 품위를 높였다.
이렇게 조선시대 사회 전반에 걸친 여성에 대한 편견과 구속은 당시 여성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
'규중처녀(閨中處女)'라고 해서 규중에 있는 처녀를 이야기하면서
이를 빗대어 '집안에서만 생활해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치부되었으니,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세 큰 줄기와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를 묶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필두로 한
조선시대의 유교사상은, 오히려 규방문화가 나름대로의 영역을 구축하도록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 됐다.
조선조 여인들의 규방문화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규방가사가 대표적인데, 이는 '내방가사(內房歌辭)'로도 불리며,
「계녀가(誡女歌)」를 비롯해 「규중행실가(閨中行實歌)」 「석별가(惜別歌)」 등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각종 사회 규범에 얽매여 있던 조선조 여인들이 나름대로의 문화생활을 영유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의 우리나라 여성들은 남성에 예속되어 시간적·경제적으로, 심지어는 정신적으로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혹자는 여성작가군의 출현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반계급의 부녀들만은 그래도 남녀노복(男女奴僕)과 침모(針母)·유모(乳母)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책을 읽고 자수(刺繡)를 하고, 사군자( 君子)를 칠 만한 마음의 여유는 있었다
. 때로는 규중 여자들이 모여 화조월석(花朝月夕)을 기릴 줄도 알았고,
춘삼월 좋은 시절에 농춘(弄春)도 하는 풍류까지 즐겼다.
또 장성한 딸을 앉혀 놓고 엄숙하게 『여사서(女 書)』 『내훈(內訓)』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속에서 여성들에 의한 문학은 싹이 트고 자라날 수 있었으며,
또한 가사문학의 일반 유행과 함께 규중에서도 가사작품이 산출되어 굴러다녔고,
그것이 좋은 작품이라면 멀고 가까운 친척의 연줄을 타고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소지하고 애독(愛讀)하는 가사는 그들의 작품뿐 아니라 부형(父兄)들이 자녀교육을 위해 지은 것도 있었으며,
유명한 학자들의 작품도 개중에는 섞여 있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조선왕조는 소위 '유한정정(幽閑貞靜)의 부덕(婦德)'을 함양시키기 위한 부녀 전용의 교과서를 많이 보급시켰는데,
『내훈』 『여사서』 등이 대표적이다.
『내훈』은 성종의 생모 인수왕후(仁粹王后)가 소학(小學)·열녀(烈女)·여교(女敎)·명감(明鑑) 등 사서 중에서
여계(女誡)에 필요한 것만을 발췌하여 편찬한 것이고, 『
여사서』는 명나라의 인효문황후(仁孝文皇后)의 『내훈』, 후한(後韓)의 조대가(曹大家)의
『여계(女誡)』, 당(唐)의 송약신(宋若莘)의 『여논어(女論語)』, 명(明)의 왕절부(王節婦)의 『여범(女範)』 등을 집성하여
영조 12년에 명에 의해 간행한 것이다.
규방가사란 조선 영조 중엽경부터 영남지방에서 주로 양반집 부녀자들 사이에서 유행된 가사를 말하는데,
'가●'또는 '두루마리'라는 이름 아래 창작·전파·애독되었다가 육이오 전쟁 이후 소멸되었다.
내방가사(內房歌辭)·규중가도(閨中歌道)·규방문학(閨房文學)·규중가사(閨中歌辭) 등으로도 불린다.
이들 규방가사 가운데 계녀가사(誡女歌辭)로서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것은
영천(永川) 정씨가(鄭氏家) 소장인 「계녀가」와, 영조 때 마전공(麻田公) 오대손(五代孫)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유실경계사(柳室警戒詞)」와, 인동지방(仁同地方)의 「규중행실가」 등을 들 수 있으나,
이 밖에도 계녀가사는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비록 규방가사의 내용 중 상당수가 계도적이거나 교훈적이긴 하지만,
그 내용들은 생활적인 모티프와 감상적인 모티프로 나눌 수 있으며,
전자는 혼인(婚姻)·회혼례(回婚禮)·회갑근친(回甲覲親)·화전(花煎)놀이·승경유람(勝景遊覽) 등이 있고,
후자는 연모(戀慕)·회고(懷古)·우국(憂國) 등을 들 수 있다.
즉 규방가사는 부녀자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생활을 노래한 것으로,
주된 내용은 교훈과 여성생활의 감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규방가사는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창작, 전파되어 충청지방과 전라도에 정착되었다.
영남지방은 조선조 예학(禮學)을 깊이있게 연구한 유림(儒林)들, 즉 영남학파의 고장이고,
이러한 예학적 전통은 규방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은 차의 재배지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는 규방가사의 창작층과 수요층이 삼남지방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는 동시에
차 재배 및 소비층과 맞물려 있다는 자료가 된다.
규방가사의 창작 및 향유층이 양반가의 여인들이었다는 것에서도 충분한 근거를 얻는다.
전통사회에서 차란 쉽게 마실 수 있는 음료는 아니었으므로 양반가가 아니라면 접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반가 부녀자라면 내용이 달라진다.
우리나라 차의 주산지인 영남 지역의 부녀자라면, 차란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음료이다 보니 관심이 없을 수 없다.
이는 조선조에 발행된 여러 계녀서(誡女書)의 내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암선생(尤庵先生) 계녀서(戒女書)'를 살펴보면,
제14장의 제목이 '의복 음식●● 도리'라고 하여 관념적인 윤리교훈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규방가사를 주제 및 내용에 의해 분류하면,
교훈류·송축류·탄식류·풍류류 혹은 교훈적인 모티프, 자탄적인 모티프, 풍류적인 모티프, 자과적(自誇的)인 모티프,
송경적(訟慶的)인 모티프, 애도적인 모티프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러한 범위는 규방 여인들의 삶을 전체적으로 아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풍류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분류된 규방가사들이다.
「화전가(花煎歌)」류의 서정성 짙은 노래로 대표되는 이러한 종류의 규방가사들은
여인들의 풍류적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쉽게 말해 먹고 마시는 일상사를 소재로 하여 창작된 규방가사들이다.
이러한 규방가사의 내용은 차를 마시는 행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규방다례란 결국 규방가사 등 이러한 규방문화,
그 중에서 조선조 양반가 여인들의 음다풍속(飮茶風俗)을 계승한 것으로,
그 뿌리는 결국 삼남지방의 전통 문화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규방다례는 우리나라 주요 차의 재배지이자 소비지인 영남지방에서 발생하여
전라와 충청지역, 즉 삼남지방에 정착된 우리 고유의 차예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그 문헌적 자료가 규방가사에서나 흔적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적지만,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 구조를 볼 때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이다.
조선조 문화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남성문화·선비문화였던 것이고,
이러한 선비문화와 대비되는 지점에 규방문화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선비문화에 비해 규범화가 덜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규방문화를 대표하는 다른 것으로는 '규중칠우(閨中七友)'가 있다.
선비들에게 좋은 벗이 된다는 종이·붓·먹·벼루 등 '문방사우(文房 友)'가 있다면,
규중칠우는 바느질을 하는 데 필요한 침선(針線)의 일곱 가지 물건인 바늘·실·골무·가위·자·인두·다리미를 통칭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되는 작자미상의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는
이런 규중칠우를 의인화(擬人化)해 인간사회를 풍자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바늘·실·골무 등을 이용한 공예부문인 자수나 한복 등이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으며 활발하게 보급되어
우리 전통문화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으며 많은 기능보유자들을 길러내 이들이 활발하게 전시활동 등을 벌이고 있다.
필자의 규방다례는 이렇게 명맥으로 이어져 온 규방의 차예절을 근간으로 하여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켰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출처-한국차문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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