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공예

오월모시

아기 달맞이 2011. 7. 16. 21:14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위에 나부낀다. 제 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1947년 금수현에 의해 작곡되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 가곡 ‘그네’는 음력 5월 5일 단오에 한가로이 그네뛰기를 하 는 풍경을 정겹게 그리고 있다. 단오를 맞아 지어 입는 단오빔 옷감으로 많이 사용 되었던 것이 바로 노래에 등장한 ‘모시’다. 모시는 흔히 여름 옷감으로 알려진 삼베 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은데, 삼베는 날이 건조해지면 올이 부러지기 쉬워 한여름 에만 입을 수 있는 반면 모시는 만들기에 따라 봄·여름·가을 옷감으로 널리 쓰였다.

모시는 몸에 잘 달라붙지 않고 습기를 흡수하고 발산하는 것이 빠를 뿐만 아니라 짜는 법에 따라 매미 날개처럼 얇고 정교하게 제작이 가능해 섬세한 고급 옷감으 로 왕과 귀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고려 시대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보면 “여자의 옷은 흰 모시 노랑 치마인데 위로는 왕가의 친척과 귀한 집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의 처첩에 이르기까지 한 모 양이어서 구별이 없다”고 하였으며, “고려는 모시(紵)와 삼(麻)을 스스로 심어 사 람들이 베옷을 많이 입는다. 제일 좋은 것을 시라고 하는데 깨끗하고 희기가 옥과 같고 폭이 좁다. 그것은 왕과 귀신들이 다 입는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모 시는 올이 가늘고 곱기로 유명해 중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중국에 보내는 주요 공물품 중 하나였다.

 
또 하나 우리나라 모시의 뛰어난 품질을 짐작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이름의 모시가 있는데 바로 ‘발이내포(鉢伊內布)’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고려 시대 함경북도 육진 에 사는 승처(僧妻)들이 짠 이 모시는 한 필이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에 다 들 어갈 만큼 얇았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러한 명성은 조선 시대까지 이어져 중국에 공물로 바치는 우리나라 저포는 모시포(毛施布)로 따로 표기됐다. 조선 중 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충남 한산 지방의 세모시를 으뜸으로 꼽고 있는데 오 늘날에도 최고급 모시 하면 한산 세모시를 떠올릴 만큼 그 품질이 뛰어나다.

모시는 짤 때 많은 수분을 필요로 하는 직물이라 조금이라도 날이 선선하면 올이 끊어지기 쉬워 옛 여인네들은 찌는 듯한 복날에도 움집에서 모시를 짰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여인들의 인내와 정성이 담겨 비로소 한 필의 아름다운 모시가 탄생 하는 것이니 어찌 그 가치를 다른 것에 비할 수 있으랴. 요즘에는 값싼 중국산 모 시가 시중에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으나 우리 모시의 아름다움을 아는 이들은 값비 싸더라도 꼭 한산 모시만 찾는다고 한다.

비단보다 더 귀한 옷감으로 대접받았던 세모시는 그 섬세함이 매미 날개에 비견되 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이고 정성스레 다듬이질해 두 겹으로 겹쳐 깨끼로 옷을 지 어 입으면 어른무늬가 생겨 더욱 멋스럽다. 봄과 여름에는 톡톡히 다듬은 모시에 익명주를 안감으로 해서 받쳐 입고, 여름에는 풀을 먹여 모시 올이 똑바로 서도록 한 후 다림질해 박이 저고리를 해 입으면 더할 나위 없다. 모시는 가공하기에 따라 서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직물이기도 하다. 정련을 하지 않아 노란빛을 띠며 빳빳한 생모시는 거칠지만 토속적인 멋이 있으며 옷을 해 입으면 소박하면서도 자 연스러운 분위기가 난다.

최근에는 색색의 모시 조각으로 지은 조각보나 주머니 같은 소품들이 인기다. 모 시 이불도 빼놓을 수 없다. 가슬가슬한 촉감과 고급스러운 청량감은 모시라는 천 연의 소재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