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남편 / 문정희

아기 달맞이 2011. 6. 9. 21:45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부부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 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속에서 앵하고 모기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 꽃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 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 시키는 긴 과정 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젤 수 없는

백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