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늙는다는 게 뭘까? 노인들만 가득한 세상(노인요양원)에서 살다 보니 아주 많이 나의 노년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예전 같았으면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노년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아직 50대 허리에 섰으니 그럴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아닌가? 확실히 인간은 환경의 지배에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그랜 토리노>에서 한 노인네, 아니 한 노신사가 나를 반하게 만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름만 들어도 그가 출연한 영화들이 죽 늘어선다. 1964년 <황야의 무법자>에서 시작하여, 1968년 <독수리 요새>, 1971년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1982년 <고독한 방랑자>, 1992년 <용서받지 못한 자>, 1993년 <사선에서>, 1995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2004년 <밀리언달러 베이비> 그리고 2008년 <그랜 토리노> 등에 이르기까지, 장르에 상관없이 줄잡아 40여편이 넘는다.
감독으로서도, 1971년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로부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개봉되지 않은 2009년 최신작 <휴먼 팩터>에 이르기까지 30여편이 넘는다. 음악과 제작을 맡은 영화들도 많다. 그야말로 영화인으로서는 종횡무진이다. 그가 감독한 대부분의 영화는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번 영화 <그랜 토리노>는 그의 노년이 정말 돋보인 작품이다. '나도 저렇게 늙어야지'라고 다짐하게 만든다.
과거에 갇혀 사는 고집불통 늙은이
|
▲ 과거에 갇혀 살기는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사랑의마을의 할머니나 마찬가지다. |
ⓒ 워너브라더스, 김학현 |
| |
그런데 영화 전반부부터 그런 마음을 먹은 건 아니다. 뭐, 저런 완고한 늙은이가 다 있어? 처음엔 그랬다. 아내의 엄숙한 장례미사, 그 미사보다 더 엄숙한 노인, 그가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 아직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기억 속의 그 시대를 사는 노인, 자신의 가치가 전부인 노인, 다른 이들과는 타협도 수용도 없는 노인, 그가 월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많이 늙었다. 맞다. 그렇게 이스트우드는 영화 속에서 월트 코왈스키로 늙어서 나타났다. 자신만의 과거의 성을 건설하고 그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 진리라고 믿는다. 고집은 왜 그리 센 건지. 짧게 깎은 머리는 아직도 그가 군인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누가 한국전 참전용사 아니랄까봐.
"나 가야 돼. 내 사랑이 기다리고 있거든."
"할머니 여기 나와서 하루 종일 계시면 안 돼요. 애인은 그만 기다리시고 이젠 방으로 갑시다. 애인이 오늘은 안 온다고 했어요."
"아냐. 아까 만나자고 전화 왔거든."
"할머니, 왜 그러세요. 안 온다고 전화 왔는데."
내가 사는 '사랑의마을(노인요양원)'에서 한 할머니와 직원의 대화다. 이 할머니는 아직도 연애 시절의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늘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 사랑'을 기다린다. 어쩜 영화 속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월트와 그리 닮았는지 모른다. 과거를 잊지 못하고 과거 속에서 사는 노인, 누가 '과거를 말하면 나이 든 거라'던 말이 생각난다.
과거의 눈으로 본 난감한 젊은이들
|
▲ 포드 자동차의 '그랜 토리노'는 영화의 신구대립 구도의 한 축이다. |
ⓒ 워너브라더스 |
| |
이마를 가로지른 질곡의 주름들이 그의 삶만큼이나 질긴 세월을 말해 주고 있다. 거기다 사랑어린 시선이라곤 찾아보려야 눈곱만큼도 없다. 장례식장에서 장난치며 시시덕거리는 손녀 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피어싱을 한 손녀는 연신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아들 내외는 일제 차('그랜 토리노'와는 대조적인)를 타고 나타나 자꾸 집을 팔자고 한다.
그 과거의 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현 세대와 자신의 성에 갇히는 것이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노인, 이들의 치열한 분투는 누구의 승리로 끝날까. 진지하게 영화를 보게 하는 요소다. 순전히 클린트 이스트우드 자신의 삶을 조명하고 디테일하고 리얼하게 나열하는 것처럼만 보이는 영화가 그래도 매력이 있게 되는 것은 이들의 심한 갈등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현실)는 도대체 어디서 접점을 찾아야할지 대략난감이다. 대화? 자녀와의 대화도 그렇지만 손자들과의 대화는 더욱 힘들다. 아니 이미 대화상대로조차 여기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손녀가 포드자동차의 1972년산 '그랜 토리노'에 관심을 두는 것은 그 값어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유산에만 관심이 있는 자녀와 손자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 수 없는 고집불통의 한 늙은이, 영화는 그런 구도로 시작한다.
그것은 가족들만 그런 게 아니다. 이웃으로 이사 온 동양계 아이가 자신의 차를 훔치려고 하는 장면에서는 가히 일말의 여지도 없이 자기 독단적이고 안하무인이다. 그런 모든 게 한국전쟁에서 얻은 노병의 처세술이란 걸 느끼기에는 신세대가 너무 멀리 가 있다.
자신의 동네에 동양계 양아치들이 판을 친다. 이제 월트가 나설 차례다. 그때 양아치들이 이웃인 흐몽족(베트남 종족 중 하나) 소년과 소녀를 괴롭히는 것을 보고 본격적으로 개념 없는 젊은이들을 처치할 생각을 한다. 물론 흔쾌한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뛰어든 것이다. 그 이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
과거가 현실 속으로
|
▲ 이웃의 문제가 월트의 문제가 될 때 비로소 그는 현재의 사람이 된다. |
ⓒ 워너브라더스 |
| |
다정다감한 동양계 이웃과는 달리 극히 개인주의적인 서양인 늙은이. 참 멋지게 대조적이다. 과거와 현재가 극히 대조적이듯. 완고하고 고집불통인 노인이 서서히 동양의 '정' 안으로 끌려들어가며 영화는 반전을 이룬다.
월트는 자신의 삶속으로 자꾸 들어오는 이웃이 신경 쓰인다.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겠다고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결과는 당하고 만다. 월트의 문제의식이 이웃의 문제의식이 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혼자'가 '더불어'가 되고, 과거가 현재가 된다.
그렇게 서서히 현재에 젖어들면서 이웃의 목숨까지도 위협하는 양아치들은 월트의 적으로 변한다. 이웃과 공동의 적을 가졌다는 게 바로 과거의 늙은이가 현재의 노신사로 변한 증거다. 이미 자신의 손에는 피가 묻었으니 자신이 하겠다는 생각이 한 늙은이를 노신사가 되게 한다.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남기를 원했던 노인이, 이웃의 영웅이 되는 순간 그의 존재가치는 격상된다.
아직도 자기만 알고 과거에 묻혀 살고 자기중심적인 고집으로 똘똘 뭉친 내 사는 집의 노인들을 보며, 어디 월트 같은 노인은 없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시간은 흐르는 것, 사람은 나이를 먹는 것, 하지만 신세대라는 물결은 여지없이 다가오는 것, 이런 시대에 노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잔잔하게 물 흐르듯 정확하게 구획된 주제를 따라 카메라는 움직인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한 노인의 감정을 잡아내려고 내러티브 기법으로 전진한다. 조금은 계산된 점이 들켜버리는 게 흠이긴 하지만 결국 이미 암시한 것에로의 안착은 박수를 쳐 줄만하다. 누구도 교화하려고 들지 않지만 노년도 소년도 교화된다. 아마 이 점이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일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