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고싶은 영화

“아흔살까지 배우로 남고 싶다”

아기 달맞이 2011. 4. 22. 22:30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출연 승낙
흰머리로 연기하고픈 ‘천생 배우’
“사치와 화려함 현혹되지 말아야”


≫ 배우 윤정희(66)씨

16년 만에 돌아온 윤정희


제63회 칸 영화공식 경쟁부문에 진출한 <시>(감독 이창동)의 여주인공 배우 윤정희(66)씨를 만났다. 1960년대 문희, 남정임씨와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윤씨는 정말 고운 할머니가 돼 우리 곁에 돌아왔다. 조용히 거울 앞에 선 듯한 그한테서는 부드러움 속에서 배우로서의 오랜 경륜이 그대로 배어나왔다.


-16년 만의 출연인데?

영화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외국 영화도 많이 볼 수 있었고 국내 영화는 10여년 동안 심사를 했기 때문에 일년에 좋은 영화를 20여편을 봤다. 좋은 작품 기다리는 준비기간이었다고나 할까.”


-1994년 <만무방> 촬영 때와 많이 다를 것 같다.


“지금은 리허설 배우가 있더라. 리허설 배우가 동선을 다 그리고 카메라·조명이 자리 받은 뒤에 촬영하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됐다. 그래서 감정의 소모를 줄일 수 있었다. 또 모니터가 있고 캠핑카가 있어서 할리우드 배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 내가 제일 큰누나더라. 젊은 친구들하고 함께 일하니까 참 기분 좋았다.”


-동시와 후시 녹음의 차이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 예전 후시 녹음은 성우들이 대신했다. 배우의 연기를 보고 목소리를 내니까 자연히 꾸민 듯한 목소리가 많았다. 당시에는 프롬프터를 보고 해서 외우는 게 없었다. 그래서 330여편의 많은 작품을 할 수 있었다. 동시녹음을 했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동시녹음은 외워야 하는 부담이 있는 반면 더 집중적으로 역할 속에 빠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시>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그동안 시나리오를 여럿 받았지만 나와 맞지 않아 거절했다. 언젠가 이창동 감독이 나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하더라. 영화제 시상식에서 만났는데 인상이 착하게 보였다. 제목도, 내용도 묻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나는 이 감독을 믿었다. 막상 시놉시스에 이어 시나리오를 받아 보니까 정말 좋더라. 내 나이에 맞는, 기가 막힌 역이구나 싶었다.”



≫ 배우 윤정희(66)씨

촬영 때 어려움은 없었나?


“나이에 맞는 역이어서 자연스러웠다. 이 감독이 연기를 하지 말라고 주문하더라. 나한테는 너무 반가운 소리였다. 하지만 말이 쉽지 그게 더 어렵다. 하루에 한 커트 찍은 적도 있다. 나는 힘들다는 소리는 하기 싫다. 평생 처음으로 눈에 핏줄이 빨갛게 서도록 열심히 했다. 하지만 백 퍼센트 자기 자신한테 만족하겠나. 나는 욕심쟁이다.”


-시를 좋아하는가?


“시하고는 가깝다. 미당과 가깝게 지낸 것이 하나의 계기다. <화사집> 간행 50돌 기념 테이프를 내가 낭송해 녹음했다. 미당 시 낭송 콩쿠르에도 초대 손님으로 시 낭송을 했다. 그분한테 직접 화사집 강의를 들은 적도 있다. 미당이 파리에 오면 꼭 우리집에 왔고 같이 시내관광도 오페라도 같이 봤다. 내가 한국에 오면 사모님이 사당동 자택에서 된장국도 끓여줬다. 영화를 찍고 나서 시가 더 각별해지더라. 침대 옆에 시집을 이만큼 놔두고 하나씩 읽고 있다. 시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꾸 그러면 진짜 죽어갈 것이다.”


-흰머리가 없다.


“아니다. 내 나이에 흰머리가 안 난 사람이 있나. 불로초를 먹은 것도 아닌데. 다행히 앞과 옆에만 있고 뒤에는 없다. 집에서 직접 염색을 한다. 좀 귀찮다. 샴푸 몇 번 하면 없어진다. 전체가 하얗지 않아 다행이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나는 90살까지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때까지 영화배우로 남고 싶다. 주름살과 함께 하얀 머리. 얼마나 매력 있는 직업인가. 그때까지 좋은 작품 한두 개는 더 할 것이다.”


-배우라는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카메라 앞에서, 스튜디오에서만 배우지, 밖에 나가서 스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직업이 배우지 배우가 내 인생이 아니라는 거다. 그렇지 않은가. 촬영 뒤에는 배우는 자연인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것이 배우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공적인 인물인 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 사치와 화려함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그게 사라지고 나면 마음이 가난해진다. 나는 배우인 것이 자랑스럽다.”



진행·정리 임종업 선임기자,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