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님

못가본 길이 아름답다

아기 달맞이 2011. 2. 7. 09:04

내 생애의 밑줄'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소리없이 나를 스쳐간 시간이었다.

시간이 나를 치유했다.

나를 스쳐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이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낼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돌아볼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갈등과 번민의 나이에만, 혹은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만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부와 명성같은, 가질 것은 다 가졌다고 생각이 드는, 한 명망 높은 소설가는 이런 말을 당당하게 털어놓는다.

“못가본 길에 대한 새삼스러운 미련은 노망인가, 집념인가. (중략) 나는 누구인가? 잠 안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스무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다.” (p26)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80세 노인’이라며 자신을 바닥으로 낮춰 재정의한 이 작가는 바로 너무도 유명한 소설가, 박완서다. 존칭 없이 이름 석 자를 쓰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저자는 우리나라의 대표작가다. ‘여성 특유’의 라는 말은, 모든 개성은 뒤로 한 채 단지 성(性)으로만 사람을 분리하는 느낌을 줘서 필자로서는 사용하기 꺼리는 단어지만, 저자는 요즘 유행하는 개그에서 나오는 말처럼, ‘여자가 어디 건방지게, 아이나 키우고 집안일을 돌봐야 했던 시절’에 용감하게 ‘소설가’라는 세계로 뛰어든 - 저자의 이미지가 우리 시대의 어머니상으로 보는 분들이 지배적이지만 - 용감한 이노베이터였다. 소설가로서의 명성은 물론이고, 이분의 용감한 행보가 없었다면 요즘 한국문학을 이끌어가는 수많은 여성작가들의 등장도 조금은 늦어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대표작하면「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그 여자네 집」,「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친절한 복희씨」등 귀에 익숙한 수많은 소설들을 끊임없이 떠오르는데, 얼마 전에는 자신의 사소한 일상을 글들을 담은 에세이집을 펴냈다. 최근엔 주로 예전에 썼던 작품들을 묶어서 내거나, 아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동화들을 주로 쓰는 저자가 책을 냈다는 사실은 서점가와 그녀를 기다리던 팬들에게 폭발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책의 머리말에서, 저자 역시 아직 사라지지 않고 노익장을 과시한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털털하게’ 털어놓는다.
책장을 넘기면서 느끼는 첫 번째 재미는 누가 봐도 어른에 어른일 것 같은 저자가, 그렇게 성인군자는 아니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스스로 본인은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80세 소설가’라고 자신을 내보이는 저자의 솔직함은 이 책의 제목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말에서는 ‘아직도 더 가고 싶다’는,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더 가고 싶다는 아련한 의지가 느껴진다. 80세가 아닌 20세 젊은이의 외침인 것이다.

“가본 길 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p25

이 대목에서 저자는 왜 스무살에 성장을 멈췄을까, 스무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번지는데, 그 사연 역시 책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학입학식은 6월 초에 있었다. (중략) 입학식을 치르고 며칠 다니지 않아 6.25가 났다. 집안 남자들의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 굶주림, 폭격과 기총 소사, 혹한의 피난길, 그 와중에서도 좌左냐 우右냐 하는 이념에 따라 혈육과 가정이 분열하고, 이웃과 친척, 직장 동료끼리도 서로 헐뜯고 고발하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사람 나고 이념 난 게 아니라 이념이 인격이나 사람다움 위에 군림하던 전후의 공포분위기, (중략) 전깃불 뒤의 어둠에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다짜고짜 우리 얼굴에 불빛을 쏘아대며 빨갱인지 반동인지를 묻는 오만한 심문자,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대답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던 시기를 거치면서 잃어버린 내 정체성...(생략)“

이렇게 털어놓는 저자의 사연은 6.25뿐이 아니다. 격동의 경제성장기를 온몸으로 부딪쳐야 했던 당시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저자 역시 가슴통증으로 비명을 삼킬 때도 있었고, 인적 드문 곳을 찾아 실컷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충동이 뭉쳐 병이 날 것 같은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할 것 천지였다.” (p31)

요즘 세대는 잘 와닿지 않겠지만, 전쟁으로 자신의 오빠가 다치고, 가족이 죽고 아들까지 죽었다면 아마 그 상처의 깊이는 386세대의 방황, 88만원 세대의 자포자기와는 또 다를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런 깊은 상처에 빠져서 매몰되지 않고, 이야기로 세상과 소통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작품들은 시대의 아픔과 소외와 현실을 담고 있어서 많은 공감을 얻는 것이리라.

자신의 뼈아픈 과거를 덤덤히 털어놓는 저자는 심각하지 않다. 블로그에 사진과 사진을 올려놓는 젊은이들처럼, 이 책에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낱낱이 그려내고 있다. 이 것이 이 책이 주는 두 번째 재미다. 저자는 요즘은 양지좋은 마당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경기도 구리의 주택가에서, 날마다 마당을 가꾸며 살아가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80세의 일상. 그런 저자는 독자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유명한 소설가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집 할머니인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 마당에 나갔다가 10시쯤 들어와 부랴 부랴 아침을 먹는다. 그리 거창한 일도 아닌데, 늘 마당일은 한도 끝도 없다든지, 채소를 가꾸는 것보다 잔디가 훨씬 손이 덜 갈줄 알고(p13)“잔디를 심었는데, 잔디 가꾸기가 말처럼 쉽지 않으니, 늘 쑥쑥 올라오는 잡풀들과 악착같은 씨름을 한다는 하소연은, 정말 독자들의 어머니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잔디밭에 등을 대고 누웠을 때 느껴지는 흙속의 탄력, 살아있는 것에 대해 느끼는 경이로움은 80인생을 살아온 한 인간의 전하는 담담한 인생 순리와 함께 소설가적인 섬세함이 느껴진다.

“잔디밭에 등을 대고 누우면 부드럽고 편안하고 흙속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꼼지락대는 것 같은 탄력이 느껴진다. 살아있는 것들만이 낼 수 있는 이런 기척은 흙에서 오는 걸까, 씨앗들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니 둘 다 일 것이다. 흙과 씨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적이 많다.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p15)

그런가하면 책장을 넘기다보면 거장으로써의 당당함 보다, 인간으로써의 겸손함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한번은 저자가 네덜란드의 크뢸러 - 뮐러 미술관에 갔을 때의 일이다. 고흐의 그림을 실컷 보자는 생각으로 갔던 저자는 오히려 맥을 못출 만큼 피로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를 ‘강력한 정신에게 허약한 정신이 한바탕 휘둘리고 난 후유증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나서 특히 <감자 먹는 사람들>에 대해 고흐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끝없이 반성한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에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p235,「반 고흐, 영혼의 편지(신성림 옮김, 예담)」)는데..책을 팔아 돈푼을 만지고 길에서 알아보고 사인해달라는 독자도 더러 생기게 되니, 내가 무슨 대가라도 된 양 자족하는 자신에 대해 욕지기가 날 것 같았다.“

저자는 성경에서조차 기적을 이뤄내는 극적인 부분보다는 예수가 당시 사람들을 신분에 관계없이 당신 식탁에 초대한 대목을 가장 좋아한다고 설명한다. 병신, 창녀들로 구성된 당시 최하층 천민들을 초대해서, 본인과 동등하게 대접을 받게 하고, 위로와 은총을 내리는 그 부분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화려함 보다는 소박하고 일상적인 풍경에 점수를 후하게 주는 저자의 성향은 특정계층을 위한 소설이 아니라, 온 국민이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쓸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