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은 해발 596m지만 몇 십 년 전까지 차도 다녀
길 중간쯤 다다르자, 뜻밖의 ‘자연휴식년제 출입통제’란 푯말이 나왔다. ‘이게 뭐냐’ 싶어 자세히 읽어 보니 길 옆 계곡에 많은 사람이 출입해서 훼손된 듯 계곡출입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길가엔 야생화가 만발했다. 올라갈수록 싸리나무도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노란색의 자잘한 꽃이 활짝 핀 금마타리, 꽃 모양이 나비를 닮은 땅비싸리, 꽃향기가 좋은 사위질빵, 뿌리나 꽃에서 노루오줌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해서 이름 붙은 노루오줌 등이 처음 온 내방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계곡에선 가끔 사람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안내한 양한모 해설사는 “이 계곡엔 원체 물이 맑아 1급수에만 사는 버들치와 메기 등도 살고 있다”고 했다. 양 해설사는 홍수로 계곡물이 넘쳐도 고기들이 그대로 살아 남는 비결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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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리재 소나무길 사이로 양한모 문화관광해설사가 길을 안내하고 있다.
- “계곡에는 많은 수초들이 살고 있죠. 그 수초와 바위 틈새에 있는 그들만의 공간으로 숨어 들어가 살기 때문에 폭우가 쏟아져도 휩쓸려 내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어요.”
길은 구불구불 굽이졌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은 듯 경사도 매우 완만해졌다. 숨결도 조금 잦아들었다. 마침 쉴 때를 아는 듯, 의자가 나왔다. 의자 뒤로는 마치 작은 폭포같이 바위 위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양 해설사는 “여기가 말 그대로 실금폭포”라고 가리켰다. 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양 해설사는 “마사토로 복토한 길이라 맨발로 걷기 좋은 길”이라고 자랑했다. 훌쩍 자란 낙엽송이 그늘을 드리워 여름에도 걸을 만했다. 마침 새끼 뱀 한 마리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지난밤에 내린 비로 젖은 몸을 말리려 나온 듯했다.
30분 정도 더 걸려 싸리재 정상에 도착했다. GPS고도로는 596m다. 웬만한 산 높이다. 길옆으로는 나무가 많긴 했지만 낭떠러지였다. 이 길로 옛날에, 아니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차가 다녔다니, 믿기질 않았다.
정상 영마루엔 ‘싸리치’ 노래 시비 있어
정상에 비석이 하나 있다. ‘싸리치’라는 제목으로 시가 새겨져 있다. ‘산굽이 돌아돌아 골짜기마다 / 싸리나무가 지천이어 / 싸리치라네 // (중략) // 단종의 애환 구름으로 떠돌고 / 김삿갓의 발길이 / 전설처럼 녹아 있는 / 영마루--- // (후략)’
정상에는 정자가 서 있고 공간이 넓어 주변을 둘러보며 쉬어가기 안성맞춤이다. 분명 영월 유배지로 가던 단종도 여기서 쉬었으리라. 그는 주변을 살피며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영월 유배지에서 단종은 적적함과 침울함을 달래기 위해 관풍매죽루에 올라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시를 한 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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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리재라는 마을과 고갯길을 이름 붙이게 만든 싸리나무.
- 달 밝은 밤 자규새 울면 / 시름 못 잊어 다락에 기대었네 /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 /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권하노니 / 춘삼월 자규루에는 삼가 부디 오르지 마소
약관도 안 된 단종이 이토록 절절하게 세상을 읊었다.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겪은 뒤 인생의 비애감을 절실히 느낀 사람 같은 감정이 스며 있다. 단종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으리라. 할아버지 세종의 온화한 얼굴과 아버지 문종의 근엄한 얼굴, 그리고 자신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성삼문·박팽년 등의 피어린 눈물도 생각나고, 숙부 세조의 무서운 얼굴도 주마등같이 스쳐갔을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시심이나 떠올리며 여기서 그냥 조용히 한세상 보내리라 결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의 끝은 거기가 아니었으니….
상왕복위사건이 무위로 돌아가자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됐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봉되고, 한 달 뒤인 10월에 만 17세의 나이로 사사(賜死)되었다. 숙부 세조의 무서운 얼굴은 어린 단종에게는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의 무슨 업 때문에 이토록 참혹함을 겪어야만 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세조의 명을 받고 단종에게 사약을 가지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은 형(刑)을 집행하고(왕방연은 사약을 거부하는 단종에게 차마 강제로 마시게 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사이 하인 복득이란 자가 활시위로 뒤에서 단종의 목을 졸라 참혹하게 숨을 끊었다는 설도 있다) 싸리재를 넘어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비통한 심정으로 시조 한 수를 남겼다. 누구나 한번쯤 봤을 법한 시조다.
천만리 머나먼 길 / 고운 님 여의옵고 / 이 마음 둘 데 없어 / 냇가에 앉았으니 /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 울어 밤길 예놋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즉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은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가족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세조의 큰아들 덕종이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죽자, 세조는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세조 역시 꿈에서 그녀가 뱉은 침 때문에 피부병에 걸려 고생했다. 그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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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리재에는 많은 야생화가 자라고 있다. 1. 꽃에서 노루오줌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해서 이름 붙은 노루오줌이다. 2. 노란색의 자잘한 꽃이 활짝 피어 벌들을 유혹하고 있는 금마타리. 3. 꽃모양이 나비를 닮은 땅비싸리꽃에 나비가 한 마리 앉아 있다. 4. 꽃향기가 좋고 가지가 질겨 지게 멜빵을 만드는 데 쓰이는 사위질빵. 5. 국화과에 속하는 벌개미취.
- 다른 한편으론 세조는 조선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었다. 그의 왕권강화와 불교 융성책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자신과 같이 다시는 왕위에 도전하지 못하게끔 왕권중심으로 정사를 펼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죽여 버린 행동은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싸리재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단종과 세조, 숙부와 조카, 조선왕조실록의 평가 등등. 실제로 지금까지도 다양한 평가가 있다. 역사적 사실은 분명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고, 단종은 그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설은 단종이 사약을 마시지 않고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묘사한다. 어찌된 일일까? 또 있다. 영월과 평창은 서로 인접한 마을인데도, 영월에서는 단종을 감싸고 도는 반면, 평창에서는 세조를 감싸고 돈다. 무속에서는 단종을 산신으로 모시면서 신격화하는 반면, 불교에서는 세조를 감싼다.
역사적 사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문학적 진실은 또 어떻게,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전설과 무속, 종교는 어디까지 사실에 근거하고 있을까? 단종의 유배길인 싸리재를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길은 역시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원주, ‘걷기의 메카’ 자처하며 걷는 코스만 20여 개 조성…국제걷기대회도 열어
원주엔 많은 축제가 열린다. 9월 1~5일에는 2010 강원감영문화제가 원주 강원감영지 및 중앙로 문화의 거리 일대에서 열린다. 감영은 강원도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을 말하며, 따라서 감영문화제의 백미는 관찰사가 각 고을을 순찰하던 순력행차가 꼽힌다. 취고수악대를 선두로 해서 기수와 군관, 군졸, 의장, 대고수를 이어 관찰사와 육방관속이 행차하며, 역대 관찰사 후손들이 뒤를 따르는 전체 2,000여 명 규모의 대형 행차와 퍼포먼스로 진행된다.
이어 9월 8~12일에는 원주따뚜 세계 군악 & 마칭밴드 페스티벌이 열린다. 미국·일본 등 9개국 20개 팀 1,500여 명이 참석, 군악대를 통한 음악의 하모니를 뽐낼 예정이다.
또 매년 4월 4일 영월 단종제 전후해서 단종 관련행사를 개최한다. 2002년엔 단종의 유배행렬 답사를 서울에서부터 싸리재를 거쳐 황둔장터까지 진행했다. 이 외에도 치악산 복사꽃축제(4월), 치악산 산나물제(5월), 장미축제(6월), 섬강축제(8월), 치악제(9월), 한지문화제(9~10월) 등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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