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추억이 넝쿨째 굴러오는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

아기 달맞이 2010. 10. 12. 01:14

지겨울 법도 한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성리, 청평, 강촌은 경춘선의 대표적인 정차역이자 대학생들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들락거렸던 단골 MT 장소다. 대학 시절 MT 공고가 나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무심결에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이번엔 어디래?" 대성리, 청평, 강촌 중 이번엔 또 어디로 가게 되었느냐는,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질문이다. 지금은 놀이 문화가 다변화되어 MT 장소도 그만큼 다채로워졌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지역 대학생들의 MT 장소는 늘 한결같았다. 경춘선을 타고 떠나는 기차 여행.

올해를 마지막으로 경춘선 기차는 화랑대역에 서지 않는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서울의 간이역. 가을 햇살이 그 위로 사뿐하게 내려앉는다. / 영상미디어 한준호 기자 gokorea21@chosun.com

중간 기착지가 어디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떠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들뜨던 시절,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북한강변을 따라 달리다 보면 가슴에 쌓아두었던 삶의 돌덩이들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경춘선은 그러니까 스무 살 청춘의 참맛을 일깨워준 '낭만 열차'이자 우리들의 젊음을 싣고 달리던 '추억 열차'였다.

통기타 연주에 맞춰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던 기억,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강변 풍경을 분위기 잡고 지켜보던 기억, 중간 중간 들렀던 작은 역사(驛舍)에 대한 기억이 애잔하다. 지금도 이런 아릿한 추억 여행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 화랑대역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화랑대역엔 역장이 근무해 간이역은 아니다. 하나 소박한 규모와 분위기를 감안하면 감성적으로 간이역이라 불릴 만하다.

경춘선 서울 초입에 있는 화랑대역에 들어서면 청춘의 추억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 오래된 목조 역사에선 나무 냄새가 켜켜이 흘러나오고, 방명록을 들추면 역사를 지나쳐 간 사람들의 사연 많은 이야기들이 갈피마다 빼곡하게 담겨 있다. "오래전 경춘선을 탔던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들른 역사에서 참 편히 잘 놀다 간다"는 고마움 가득한 사연이다.

화랑대역의 나이는 고희를 막 넘긴 71세. 1939년 태릉역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기차를 받기 시작한 이 역은 1958년 '화랑대'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고 경춘선의 한 노선을 70년간 말없이 지켜왔다. 화랑대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육군사관학교 바로 옆에 역사가 있기 때문. 육사 정문에 유난히 바짝 붙어 있는 탓에 얼핏 보면 학교 경비실로 착각하기 쉽다.

화랑대역은 청량리에서 출발한 기차가 무심히 달리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긴 춘천행 여정을 시작하는 곳이다. 예전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가며 추억을 만들었던 곳이지만 지금 풍경은 한적하고 을씨년스럽다. 차편이 많이 줄었고, 오가는 사람도 그만큼 많이 줄었다.

현재 화랑대역에 정차하는 기차는 상하행선을 포함해 하루 총 7편. 춘천행 하행선은 오전 6시 28분, 9시 49분, 오후 6시 59분 화랑대역에 정차하고, 청량리행 상행선은 오전 7시, 11시 10분, 오후 2시 27분, 7시 31분 하루 4회 화랑대역에 정차한다. 화랑대역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가는 열차까지 모두 포함하면 하루 약 24편의 기차(1시간에 한 대꼴)가 현재 화랑대역을 지나가고 있다.

그나마도 올해를 마지막으로 화랑대역은 긴 노동의 의무를 마치고 거창한 '은퇴식'을 갖게 된다. 경춘선 노선이 일부 변경되면서 이제 춘천행 기차는 더 이상 화랑대역을 지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화랑대역은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이라는 별명 외에 '기차가 다니지 않는 간이역'이라는 서글픈 별명까지 추가하게 되었다. 다행히 건축학적 가치가 높은 화랑대역 역사는 허물지 않고 고이 보존되어 기념관 겸 갤러리로 쓰일 예정이다.

화랑대역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싶은 욕심에서인지 요즘 이곳을 찾는 사람 중엔 기차 손님보다 역사를 둘러보러 오는 손님이 더 많다. 세심한 역장은 이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석유난로와 고풍스러운 그림 액자, 나무 의자와 탁자를 운치 있게 갖춰놓고 커피와 차를 준비해 두었다.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무인 카페에 돈을 내고 마시면 된다.

벽면에는 화랑대역에 관한 다양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오래 앉아 쉬어 갈 수 있도록 읽을거리도 다양하게 마련해 놓았다. 뭔가 느낌을 적고 싶으면 방명록을 들추고 누군가가 남겨놓은 추억 위에 내 추억을 덧붙이면 된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으면 기념엽서를 몇 장 구입하는 것도 좋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간이역의 운치 있는 풍경이 잘 담겨 있는 사진엽서다.

문화재청은 2006년 9월 대한민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65개 간이역 중 문화적으로 가치가 높은 간이역 12곳을 선정해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이 중 문화재로 지정된 12개의 간이역 중 유일하게 서울에 있는 역이 화랑대역이다.

이곳의 지긋한 나이와 가치를 알려주는 지표는 선로 앞을 지키고 있는 낡은 나무 의자. 기차는 노선을 바꾸고 더 이상 이곳을 지나가지 않지만, 나무 의자만은 수많은 풍파 속에서도 장하게 이곳을 지키고 있다. 화랑대역의 역사를 기억하는 나무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느리게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 여행을 즐기는 가장 멋진 방법이다.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서 내려 1, 4, 5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에는 1번 출구로 나와 202, 1155, 1156 등의 버스를 갈아타고, 걸어서 갈 경우에는 4, 5번 출구로 나와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길게 늘어선 '걷고 싶은 길'을 향해 직진. 약 1㎞(15분 거리) 정도 산책 삼아 걸으면 육군사관학교 정문이 나온다. 정문을 바라보고 왼쪽에 경춘선 화랑대역이 있다. 화랑대역과 육군사관학교(인터넷에서 방문신청을 해야 한다)를 구경한 후 내친김에 근처 조선 중종 왕비 문정왕후의 무덤인 태릉을 들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태릉은 화랑대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