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노천명 ‘장날’
모란시장의 풍경.
아무리 세월이 어려워도 추석이 오면 부산해지는 마음만은 마찬가지다. 어린 날, 대추를 안준다고 울던 ‘이쁜이’는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어 명절을 앞두고 이제는 자신이 장을 찾는다. 부쩍 오른 물가 때문에 다소 어깨가 무겁지만 제수를 준비하는 정성만큼은 여전히 소홀할 수 없다. 가까이 마트니 마켓이니 널려 있어도 추석차림만은 아무래도 재래시장이 제격이다. 같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느껴지는 기분부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장터에는 고향이 있고, 우리네 살아온 삶이 있고, 추억이 있다. 그것은 명절이 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장으로 가자. 장도 보고, 그곳의 산물들이 전해주는 고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 모란장
수도권의 재래장터로는 성남의 모란장(3·9일장)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도심 가운데 자리하고 있지만 그 흥성거림에 있어서는 여느 장터에 못지않다. 아니 이제 하루가 다르게 쇠락해가는 시골 장터들보다 오히려 장터다운 분위기가 훨씬 더 살아있다. 주변 수요가 많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도권 장터의 특성상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온갖 물산들이 모이고, 장꾼도, 장보는 사람들도 그만큼 구구각색이기 때문이다.
왜 ‘모란’ 장인가. 모란장의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육군 대령 출신의 김창숙이란 사람의 기록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창숙의 고향은 평양으로, 홀어머니를 두고 남하하여 군에 입대, 1958년 32세의 나이에 대령으로 예편했다.
당시 주소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탄리로 되어 있고, 3년 후인 1961년에 광주군수로 부임했다. 예편 후 가난한 제대군인들을 모아 광주 일원에서 개간사업을 벌이던 중 5·16으로 군부가 집권하자 광주군수로 전격 기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3개월 만에 군수직을 그만두고 다시 자신이 세운 재향군인개척단으로 돌아갔다. 개간사업이 활발해지면서 동네가 형성되자, 그는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으로 평양 모란봉의 이름을 따 마을 이름을 ‘모란’이라 지었다. 그 후 대원들의 생필품 조달 등 생활여건 조성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5일장인 모란장을 개설함으로써 오늘날 전국 최대 규모의 민속시장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주지하다시피 모란장의 명성은 개시장에서 비롯한다. 한동안 모란장은 개시장의 대명사 격이었다. 하지만 개고기가 ‘혐오식품’ 논란에 휩싸이고 분당 등의 개발로 신세대들이 지역에 대거 유입되면서 개시장으로서의 명성을 오명이라고 생각했는지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개를 사고파는 부서의 명칭을 ‘애견부’라 해서 애완견이나 특수견을 주로 거래하고, 식용견들은 다른 가금류들과 함께 매 3·8로 끝나는 날 따로 도매장을 형성하기도 했다. 현재 모란시장 상인연합회에 등록된 회원 수는 976명. 장날마다 1000여명의 상인과 수만명의 장보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워낙 많은 상인들이 몰려 있다 보니 각자의 자리가 비좁고 통로가 좁아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성남시에서는 인근에 새 부지를 마련하고 장을 이전할 계획이다. 새로 자리를 닦아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보다 넓은 공간에서 보다 안정적으로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기대로 상인들은 이전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모란장에서 준비하는 추석 상차림
장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본격적인 추석 장보기에 들어가보자. 먼저 ‘이쁜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대추·밤을 파는 좌판부터 들러본다. 그토록 ‘이쁜이’의 애를 태웠던 대추의 현 시세는 한 되에 3000원, 두 되에 5000원선. 밤 역시 비슷한 가격이다. 모란장에는 경산 대추가 많이 나와 있지만 원래 대추 산지로 가장 유명한 곳은 충북 보은이다.
‘보은 처녀 시집가면 대추 흉년’이라는 속담이 있다. 대추가 임산부나 남자의 기에 좋다는 말을 듣고 자란 보은 처녀들이 시집갈 때 집안의 대추를 모조리 긁어 간다 해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대추는 이제 제수용이나 삼계탕의 부속물 정도로 쓰임새가 줄어 평소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왼쪽)모란시장안의 대추파는 곳. (오른쪽) 모란시장에 굴비가 걸려있다.
밤은 공주 정안 밤이 유명하다. 옛말에 ‘밤나무골에 효부 난다’ 했다. 그만큼 밤이 사람 몸에 좋다는 뜻이다. ‘동의보감’에도 ‘밤은 가장 유익한 과일로 기를 도와주고 장과 위를 든든히 하며 신(腎)을 보해주고 허기를 메워준다’고 쓰여 있다. 제사가 끝난 후 졸린 눈을 비비며 한입 베어 물던 생율의 그 서걱한 맛은 잊기 어렵다.
대추와 밤은 추석 차례상에서 맨 앞줄(열로는 마지막인 5열) 첫번째로 놓이는 과일이다. ‘조율이시(棗栗梨枾)’라 하여 왼쪽부터 대추, 밤, 배, 감의 순으로 놓는다. 또는 ‘홍동백서(紅東白西)’라 하여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기도 한다. 배는 두말할 것도 없이 나주 배가 으뜸이고, 감은 정읍이나 영동 등 여럿이며, 청도는 씨 없는 감인 ‘반시’가, 진영은 ‘단감’이 유명하다. 사과는 최근 청송 산이나 밀양 ‘얼음골 사과’가 인기를 끌고 있다. 과일과 함께 5열 한쪽을 차지하는 한과는 담양 창평 산이나 강릉 갈골한과, 봉화 닭실한과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차례상 차림에 좀 더 들어가 보면, 신위를 모신 위쪽에서부터 1열이 시작되는데, 1열에는 시접, 잔반, 밥과 국을 올리고, 편 위에는 송편을 올려놓는다. 2열은 고기 종류로 ‘어동육서(魚東肉西)’라 하여 생선은 동쪽, 육류는 서쪽에, ‘두동미서(頭東尾西)’라 하여 생선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으로 놓는다. 3열은 생선탕, 두부탕, 고기탕 등의 탕류를 놓고, 4열은 ‘좌포우혜(左脯右醯)’라 하여 좌측 끝에 포를, 우측 끝에 식혜를 놓고 가운데는 삼색나물, 간장, 침채 등으로 채운다. 복숭아나 삼치, 꽁치, 갈치 등 ‘치’자가 들어간 것은 쓰지 않으며, 고춧가루나 마늘 양념도 해서는 안 된다.
최근 잦은 비와 태풍 등으로 해서 과일, 채소 가격이 영 불안하다. 모란장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오세덕씨(69)는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지금 추세로는 작년에 비해 한 30% 정도는 오르지 않겠느냐”고 걱정이다. 시장 한쪽에서 국수집을 열고 있는 이종협씨(53)는 “어렵다 어렵다 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잖느냐”며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고향이 경기도 광주인 그는 “명절 때 얼른 고향에 다녀올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도 했다.
5일장인 모란장은 매달 한 차례씩 끼게 마련인 월요일 장과 말일 장이 가장 장사가 안 된다고 한다. 월요일은 휴일 동안 나들이 등으로 돈을 많이 쓴 탓이고, 월말은 각종 공과금을 내느라 주머니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시장은 그런 곳이다.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은연중 드러나는 곳, 삶의 애환이 그렇게 자락을 깔고 있는 곳, 그래서 장은 거꾸로 사람의 삶을 쓰다듬어주기도 한다. 장바구니가 가벼워서 마음이 무거운가. 장바구니는 비록 풍족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풍요만은 잃지 말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로 하자.
문학작품 속의 장터
평창 대화장-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다른 축들도 벌써 거진 전들을 걷고 있었다. 약바르게 떠나는 패들도 있었다. 어물장수도, 땜장이도, 엿장수도, 생강장수도 꼴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축들은 그 어느 쪽으로든지 밤을 새며 육칠십 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장판은 잔치 뒷마당같이 어수선하게 벌어지고, 술집에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주정꾼 욕지거리에 섞여 계집의 앙칼진 목소리가 찢어졌다. 장날 저녁은 정해놓고 계집의 고함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대화장
소설 속에 진부장과 대화장이 같은 날 서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 진부장은 3·8일장이고 대화장은 4·9일 장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주무대인 봉평은 2·7일로 끝나는 장이 서니, 강원도 평창의 장터 구경은 1과 10으로 끝나는 날만 피한다면 세 곳 중 한 곳은 너끈히 둘러볼 수 있다.
그 중 대화장은 한갓져서 좋다. 소설 역시 봉평장에서 대화장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지만 봉평에서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을 구경하고 난 다음 대화로 가는 길을 잡으면, 그 길은 그대로 ‘메밀꽃 필 무렵’의 문학기행이 된다. 가는 도중 군데군데 하얗게 흐드러진 메밀밭은 소설 속 분위기를 고스란히 재현해준다.
메밀꽃을 관광상품으로 내세우면서 봉평장이 덩달아 흥성거리는 곳이 되어버린 것에 비해 대화장은 여직 순진한 시골 장터의 모습이다. 옥수수나 감자 같은 풋것들을 좌판이랍시고 벌인 할멈이나, 도무지 이런 시골바닥에서는 별 효용이 없을 것 같은 분재화분을 늘어놓고 긴 간이의자에서 늘어지게 잠만 자는 장사치나, 장터 한 구석에서 메밀전 지지는 냄새로 장터 구경에 겨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인심 좋게 생긴 아낙들로 이루어진 풍경은 어쩌면 메밀꽃보다 더 토속적이고 더 탐미적이다. 어쩌다 허름한 주막이라도 기웃거릴라치면 탁배기 한 잔에 시름을 나누는 노인네들의 담소 속에서 ‘허생원’이나 ‘동이’의 후일담이다 싶은 이야기 한 토막을 엿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대화장은 평창의 여느 장과 마찬가지로 강원도 심심산골의 풋것들을 주 품목으로 하고 있다. 메밀과 감자는 말할 것도 없고, 옥수수, 콩, 조 등 곡류에서부터 당귀, 작약, 지황, 오미자 등 약류에 이르기까지, 또 어떨 때는 국적 불명의 녹용까지도 등장한다. 단연 주전이랄 수 있는 메밀은 옛날 선인(仙人)들이 즐겨 먹었다는 식품으로 소화가 잘 되고 필수 아미노산과 식물성 단백질이 풍부하며,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해주는 성분이 들어 있어 혈압 환자에게 아주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봉평의 이효석문학관은 그의 문학세계와 아울러 메밀꽃의 생태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메밀전시관을 두고 있다.
청송 진보장- 김주영 ‘외촌장 기행’
“막걸리는 뜨물같이 싱거웠고 파전 역시 그랬다. 나는 술값을 치렀다. 대폿집을 나와서 잠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고, 장꾼들이 떠나버리고 휘장이 걷힌 빈 장터에는 허섭스레기가 뒹굴고 있었고 아이들이 땅에 떨어진 상품의 상표 같은 종이들을 줍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의 시선 맞은편 석벽과 마주하고 나란히 뻗어 있는 방축이 바라보였다. 그녀가 그 방축을 눈으로 가리켰고 우리는 그곳을 겨냥하고 걷기 시작했다. 그래, 이 여자는 지금 여인숙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떠나고 있을 게다.”
-김주영의 ‘외촌장 기행’ 중에서
불 구경이나 싸움 구경만큼이나 재미있는 게 장터 구경이라지만 쇠락해가는 시골 장터의 풍경들은 그런 재미를 가끔 무거움으로 앗아간다. 흥청거리던 장터의 분위기는 고사하고 마지막 남은 장꾼들의 애환마저도 사라져버린 장터-. 마치 오래된 습관인양 장이 열리고 그 장터를 또 무슨 버릇인양 하릴없이 어슬렁거려 보지만 도무지 흥이 나질 않는다. 가을의 진보장터는 농사일이 한창 바쁜 철인지라 그나마 촌부들의 발걸음마저 빼앗긴 채 한산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추석이 코앞에 닥치면 이 장터도 잠시나마 다시 활기를 되찾겠지….
진보장
청송의 진보장(3·8일장)은 김주영의 소설 ‘외촌장 기행’의 무대다. 이곳 진보 태생의 작가는 어릴 적 기억을 토대로 떠도는 삶의 모습들을 그려낸다.
‘나’는 지나는 길에 외촌장에 들렀다가 불현듯 근처 여인숙에 묵게 된다. 여인숙 끝방에서는 대낮부터 짓거리를 해대는 남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장터를 떠도는 야바위꾼 사내와 그를 따라다니는 여자다. 여자는 사내가 잠든 후 방을 나서다 마루 끝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나’를 발견하고 술 한 잔 사달라고 한다. 어차피 뚜렷이 할 일도 없던 ‘나’는 별 생각 없이 여자를 따라 나선다.
청송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다. 이제 중앙고속도로가 안동을 지나고, 안동에서 청송까지는 차로 30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는 마당에 여전히 청송 가는 길이 멀다고만 하는 것은 순전히 심리적인 거리 때문이다. 봉화, 영양과 함께 청송은 경북 북부의 오지를 이룬다. 산과 들, 그것도 푸르고 깊기만 한 산과 물이 청송의 전부다. 그러나 청송이 그토록 멀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오지라서가 아니다. 정작 청송을 멀고도 먼 곳으로 느껴지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진보 가까이에 있다. 청송교도소. 얼마 전까지 청송보호감호소라 불리던 악명 높던 곳. 사회보호감호법이 폐지되면서 청송보호감호소도 일반교도소로 바뀌어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청송보호감호소라는 이름이 주는 아득함만은 쉬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청송은 논이 적고 밭이 많아 콩, 보리, 밀, 면화, 담배, 고추 등의 생산량이 많던 곳이다. 특히 청송의 보리는 자못 유명했는데 보리의 수요가 감소하면서 옛말이 되었고, 지금은 주왕산 자락에서 나는 사과가 대표 산물로 자리 잡았다. 청송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일교차가 큰 지역적 특성 때문에 육질이 단단하고 당도가 유난히 높아 ‘꿀사과’로 불린다. 이밖에 청정고추와 함께 표고버섯, 약대추와 발효식품 등이 특산물로 꼽히고 있다. 진보장의 품목들 역시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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