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신불산 - 안개, 구름, 바람, 억새를 따라 흔들리다

아기 달맞이 2010. 8. 4. 08:15

신불산은 ‘영남 알프스’라는 뭉텅이 호명에 불려 나온다. 이른바 영남 알프스는 낙동정맥 남단의 고헌산(1,032), 가지산(1,240), 능동산(983), 간월산(1,083), 신불산(1,208), 취서산(영축산 1,059)과 낙동정맥의 서쪽 가지줄기에 맺힌 운문산(1,188), 천황산(1,189), 재약산(1,189) 등을 뭉뚱그려 이르는 말이다. 이들 산을 하나의 산군으로 묶는 동질적 요소는 산등성이의 드넓은 억새밭이다. 누군가 이들 억새밭의 풍광을 알프스 산자락에 비유해 ‘영남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조금은 생뚱맞은 이 이름의 내력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기로 하자.

신불재에서 취서산 가는 쪽 첫 봉우리에서 서쪽 기슭으로 흐르면 백련계곡과 청수골에 닿는다.

영남 알프스라는 집단적 명칭의 후광효과는 대간이나 정맥의 산들보다 위압적이다. 예컨대 백두대간의 산들은 그 낱낱의 개별성이 백두대간이라는 이름에 가려 희미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높이와 넓이에 따른 우열 개념보다는 독자성이 부각된다. 윤지미산이나 눌의산 같은 산들은 백두대간이 아니었다면 동네 뒷산으로나 존재했을 것이다. 백두대간이라는 이름 속의 이들 산은 백두산과 동등하다. 비중과 선호도의 차이는 사람살이의 역사와 문화의 결과일 뿐이다.

영남 알프스라는 이름으로 집단 호출 당하는 산들은 마치 제복에 갇힌 사람들 같다. 더욱이 이 이름에서는 ‘남의 밥에 든 콩’을 바라보는 가난한 눈길이 느껴져서 마음 한 귀퉁이가 그늘진다. 한국의 땅덩이가 넓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알프스나 히말라야의 고산과 대륙의 풍광과 비교해 마냥 그것들을 부러워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아하면 된다. 당장, 아니 언제나 중요한 일은 내 밥의 콩을 꼭꼭 씹어 먹는 일이다. 징집당한 군인이라 해서 개성마저 버리지는 않거늘, 영남 알프스의 산이라 하여 왜 독자적 존재감이 없겠는가.

오로지 ‘신불산’만을 오르기로 했다. 속 좁은 남자가 제 마누라를 바라보는 남자들은 모두 음흉한 놈으로 간주하는 쩨쩨한 태도로 온 하루를 신불산에 바치기로 했다.


거침없이 지나면서도 점령군 행세를 하지 않는 바람처럼

(위)간월재에서 신불산으로 오르는 길.(아래)간월재 억새평원으로 내려서는 길.

배내골에서 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상단지구)을 경유해 간월재로 오르는 행로를 택했다. 배내골은 지금 행정지명으로 이천리(梨川里)로 불린다. ‘배내’의 음을 한자 ‘이천(梨川)’으로 옮겨 적은 것인데, 실은 ‘뱃속처럼 길고 깜깜한 골짜기라는 뜻’이라는 게 김장호 선생의 견해다. 한자 지명이 뜻하는 ‘먹는 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얘기다.

간월재엔 북상한 장마전선의 꼬리가 뿌려놓은 안개로 가득하다. 배내골, 즉 서쪽 기슭에서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상승기류는 간월산과 신불산 꼭대기에 구름을 쌓았다가 다시 거두기를 반복한다.

간월재는 산허리에 걸린 여느 고갯마루와는 사뭇 다르다. 광활한 평원 같다. 평원의 주인은 억새다. 그 무리는 약 10만 평에 이른다. 간월산에서 또는 신불산에서 구름을 밟고 이곳으로 내려선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넉넉하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고산 평원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고산 평원은 사람의 마음을 그곳을 지나는 바람의 크기로 확장시킨다. 거침없이 지나면서도 점령군 행세를 하지 않는 바람처럼, 조금의 소유욕도 없이 천하를 얻은 듯한 기분에 젖어들게 한다. 그것은 보는 대로 느끼는 마음이다. 기암이나 거목을 만났을 때 느끼는 경외감 혹은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관념적 번역을 하는 경우와는 다르다. 일단 눈앞에 펼쳐지는 풍정은 쉽게 다가온다.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보는 만큼 다 내 것이다. 시인 묵객의 안목 따위도 필요 없다. 그것은 배불리 먹을 만큼 사냥을 한 사냥꾼이 눈앞에 지나는 사냥감을 느긋이 바라보는, 어쩌면 조물주와 같은 높이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억새밭 위로 안개가 흐른다. 안개는 좀 색다른 어둠이다. 눈을 무력화시키는 능력은 밤보다 뛰어나다. 하지만 유혹적이다. 도시의 안개처럼 음습하거나 불안감을 유발하지 않는다. 공개된 은밀함은 산과 나만의 비밀을 만든다.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도 다른 사람과 온전히 공유하지는 못한다.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신불산을 오른다. 사람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 나는 안개 속이고 저 사람들은 구름 속이다. 안개와 구름의 차이는 무엇일까? 상식적인 수준에서 말하지만 안개와 구름은 본질적으로 같다. 모두 작은 물알갱이가 응결해 생긴 것이다. 차이라면 구름은 공중에 떠 있고, 안개는 지표면 가까이에 있다는 점이다. 산에서의 경우는 관측 시점이 안개와 구름을 가른다. 조금 후 나는 구름에 가린 봉우리에 올라 다시 안개와 함께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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