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추억과 맛이 살아 숨쉬는 골목에서...

아기 달맞이 2010. 7. 30. 23:28

작열하는 태양이 떠오르면 도시는 기지개를 켠다. 고층건물들은 분주하게 빛을 뿜어내고 쭉쭉 뻗은 도로는 도심 곳곳을 거미줄처럼 잇는다. 하지만 21세기 첨단도시 서울 속에도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정경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차를 타고는 접근하기 어려운, 곰치 뱃속처럼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이어지는 서울의 골목길에는 오래도록 묵어온 이야기와 정이 흐른다.





◆ 영화인의 거리 충무로 뒷골목

한국 영화계의 심장과도 같은 충무로. 하루가 멀다 하게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지고 스타가 탄생하는 곳이다. 항간에서는 '한물갔다'고 폄훼하기도 하지만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충무로 5가까지 2㎞에 이르는 이 거리는 무려 70개가 넘는 영화사가 들어서 있던 이른바 '한국 영화의 메카' 다. 90년대에 들어서서 대기업의 자본력에 밀린 소규모 영화사들이 문을 닫고 이후 국제통화기금(IMF) 경영으로 여러 군소 극장이 정리되었지만 1천만 관객 시대를 맞고 칸의 영광이라는 기염을 토해내며 지금도 여전히 '한국 영화와 스타의 거리'로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오랜 세월, 영화인들은 오밀조밀한 충무로 골목 안 밥집에서 밥을 먹으며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고, 든든한 뱃심으로 영화를 만들고, 스타를 키워냈다. 그래서인지 이 골목 음식점들 간판은 상호와 함께 영화 포스터가 인쇄되어 있고 영화인들의 모임장소로 단골집이자 아지트 역할을 한다.

요즘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는 트렌디하고 근사한 인테리어는 아니지만 값싸고 양 많고 맛 좋은 충무로 맛집들은 명보극장에서 대각선으로 건너편 길 안쪽 초동길에 자리하고 있다. 골목을 걸어 들어가면 인쇄소들 사이로 왼편에 '제일옥'이 눈에 띈다. 40년 전통을 지닌 이곳은 충무로 영화인들이라면 스카라극장과 더불어 빈번하게 들렀을 설렁탕집으로, 사골국물이 깔끔하고 양지머리와 도가니를 삶아 국물을 낸 도가니탕은 마늘의 뒷맛이 남는다. 이곳과 쌍벽을 이루는 '파주옥' 역시 오랜 단골을 지닌 내력 있는 집이다.

이 골목에 자리한 집들은 대체로 음식 맛이 좋은데 특히 '털보 스테이크', '대성 닭한마리', '팔도보쌈' 등을 들 수 있다. '털보 스테이크'는 상호대로라면 털보 주인아저씨가 운영하는 스테이크 양식당 같지만 실은 30년 전통의 부대찌개 전문점이다. 다섯 종류 소시지와 햄, 깍둑 썬 두부, 떡국떡과 김치, 콩나물을 넣고 라면사리와 치즈 한 장, 콩을 올린 뒤 소뼈육수를 부어 끓여 준다. 햄은 기름기를 빼고 소시지는 데쳐서 넣어 칼칼하고 개운하다. 또 이 집의 모둠구이는 스테이크, 티본, 소시지, 베이컨 등을 불판에 얹고 그 위에 새송이버섯, 통마늘, 피망, 양파를 푸짐하게 담아 철판에 익혀가면서 먹는데 양이 워낙 많아 밥까지 볶아 먹으면 정말 배가 부르다.

맞은편 '팔도보쌈'은 20년 된 집으로 입구 왼편 유리창으로 보이는 윤기가 흐르는 족발과 빈대떡 부치는 모습이 입맛을 당긴다. 상호대로 이곳의 인기 메뉴인 보쌈은 커다란 접시에 돼지고기수육과 김치가 담겨 나오고 상추, 새우젓, 쌈장 등이 곁들여진다. 이곳의 보쌈김치는 여느 보쌈집과는 다른데, 김치 한 장마다 속을 넣고 도르르 말아 낸다. 상추 한 장에 돼지고기 한 점 올리면 그 위에 얹기 딱 좋은 크기로 썰린 김치는 매콤달콤하고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족발은 돼지 앞다리를 주로 사용하며 공깃밥이 함께 나와 한 끼 식사로 충분한 보쌈정식도 인기 메뉴다.

팔도보쌈 건너편에는 간판도 제대로 없는 생선구이집이 두 곳 있다. 간판이 없으니 전화번호도 알 수 없는 생선구이집은 비좁은 실내 덕분에 줄을 서야만 식사를 할 수 있다.

충무로에 또 한 곳 놓쳐서는 안 될 집이 있으니 바로 '사랑방 칼국수'로 알지 못하면 그저 스쳐 지나갈 허름한 집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두운 실내에 탁자들이 비좁게 놓여 있고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돌리는 30년 된 전화기며 그을음 잔득 붙은 두꺼비집, 주방 입구에 쌓아놓은 구공연탄이 보인다.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젊은이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물건들이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역시 칼국수로 닳고 닳은 양은냄비에 보글보글 끓여 내오는 칼국수는 40년이라는 세월만큼 깊은 맛을 낸다. 오로지 멸치만을 넣어 끓였다는 국물은 갖가지 해물을 넣은 내로라하는 국물들보다 맛있고 마늘, 고춧가루, 파, 통깨 같은 양념을 더해 이곳만의 맛을 완성한다. 달걀 넣은 칼국수를 시키면 뜨거운 칼국수에 날달걀을 퐁당 빠뜨려서 내오는데 저어 먹으면 보드라운 면발과 잘 어울린다. 또 닭백숙은 시골 외갓집 평상에 걸터앉아 먹던 것처럼 손으로 살코기를 찢어 쟁반에 담아 내오고 밥과 백숙국물이 따라 나온다. 닭백숙 한 마리는 2~3인이 먹으면 적당하다.





◆ 허기진 배를 달래는 순화동 골목

순화동 골목 역시 오래된 맛골목이다. 점심시간이면 고가도로 옆 작은 식당 근처로 웅성웅성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바로 '장호 왕곱창집'에 점심식사를 하러 온 것. 길 쪽 입구는 사람이 지나다니니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방 옆 쪽문에 줄을 선다. 이 집의 별칭은 '짤라집'. '짤라'라고 주문하면 잘 삶은 곱창을 가져와 가위로 툭툭 잘라주기 때문이다. 간판격인 왕곱창은 소주와 함께하는 저녁 메뉴이고 점심에는 말하지 않아도 김치찌개를 낸다. 반찬은 달랑 신 김치 한 대접 그리고 꼬들꼬들한 밥이 나온다. 김치에 돼지고기, 두부, 양파와 마늘 등을 넣은 별반 특이할 것 없는 찌개가 끓으면 라면을 넣고 끓여 먹는다. 겉보기에는 여느 김치찌개집과 다를 바 없고 보글보글 끓는 찌개 열기에 무덥기만 한데 에어컨 없이 미닫이문을 열어놓는 것이 전부다. 밑반찬도 없고 예약은커녕 신용카드도 안 되고 전화도 잘 받지 않는다. 그런데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시원하고 개운한 국물, 바로 그 환상적이고 중독성 있는 맛 때문이리라.

장호 왕곱창에서 모퉁이를 돌아가면 '만리성'이라는 중국집이 하나 있다. 입구에는 돈 많이 벌기를 바라는 듯 손 위에 동전을 잔뜩 올린 중국 인형이 반긴다. 그래서인지 손님이 바글바글. 선불을 내고 기다리는 사이 벽면을 보면 연예인들의 사인이 가득하다. 잠시 후 단무지와 이곳의 대표 메뉴인 홍합짬뽕 그리고 빈 접시가 나온다. 빈 접시는 홍합 껍데기를 담는 용도인데 홍합을 쏙쏙 빼 먹노라면 껍데기가 산을 이룬다. 국물이 시원하고 얼큰한 홍합짬뽕을 다 먹으면 달콤한 시럽을 바른 동그란 도넛 몇 알이 디저트로 나온다. 장호 왕곱창, 만리성 모두 중앙일보사 맞은편 골목 오른쪽에 있다.

이 근방에서 점심 메뉴로 인기 있는 곳 중 하나는 정동길 중간쯤에 있는 '남도식당'으로 허름한 추어탕집이다. 구수한 호남식 추어탕을 내놓는데 작은 간판에 볼품없는 외관이지만 점심시간을 전후해 긴 줄이 이어진다. 메뉴는 추어탕 한 가지. 미꾸라지를 삶아 뼈째 으깬 후 고운체에 걸러 얼갈이배추, 느타리버섯 등을 넣고 다시 끓여 뚝배기에 내온다. 미꾸라지가 많이 들어가 걸쭉하고 맛이 진하며 된장과 들깨가루로 맛을 내 구수하다. 추어탕이 모자라면 얼마든지 더 주는데, 밥을 말아 먹거나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반찬으로 나온 오이김치를 한 조각 씹으면 아삭아삭 기분까지 좋아진다. 근처 직장인들이 주로 찾는데 상사들이 점심으로 추어탕을 얘기하면 부하직원이 먼저 와서 줄을 서야 한다. 예약을 받지 않고 신문, 방송 보도 등 홍보는 일체 사양하며 맛으로 승부하는 집이다. 덕수궁 입구 쪽에서 시작되는 정동길 중간쯤 정동극장 옆 골목에 있다.

◆ 아는 사람만 아는 종묘 순라길

서울을 소개하는 책자에 빠지지 않는 곳이 있으니 경복궁, 종묘 등 궁궐이다. 특히 사적 제125호인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더욱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종묘 담을 따라 이어지는 순라길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선시대 궁궐을 호위하던 순라들이 화재가 날까 도적이 들까 염려해 딱딱이를 치며 야간 순라(순찰)를 돌던 길이 바로 순라길이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이니 당연히 순라를 돌았다. 이렇게 순라를 돌던 길은 5대 궁궐과 종묘 사직단 등 여러 길이 있었지만 그 길이 온전히 살아 있고 명칭까지 남아 있는 곳은 종묘 옆 순라길이 유일하다. 종묘 정문에서 왼쪽 방향이 서순라길, 오른쪽 방향이 동순라길이다.

종묘 돌담을 따라 서순라길로 들어서면 야외 탁자가 놓인 작은 음식점들이 있다. 소주 한 잔 하기 적당한 곳으로 찌개, 닭발 등과 더불어 수구레를 판다. 수구레는 소의 껍질과 살 사이에 있는 아교질로 쫄깃쫄깃한 맛이 그만인데 돼지 껍데기처럼 삶아 고추장양념에 볶아두었다가 주문을 받으면 데워서 내준다. 수구레만을 푹 고아 굳히면 묵처럼 엉기는데 이를 이용한 수구레족편은 황백 달걀지단과 다진 미나리, 파, 석이버섯과 대추채를 고명으로 얹으면 귀한 궁중음식이 된다. 새삼 눈앞의 궐담이 눈에 들어온다.

서순라길 끝자락에 이르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홍탁삼합집 '순라길'이 있다. 허영만의 만화 < 식객 > 에 등장한 곳으로 홍어찜, 홍어탕, 홍어무침, 홍어회가 맛나고 그중 최고는 역시 홍어삼합이다. 삭힌 홍어회와 삶은 돼지고기, 묵은 김치가 함께 나오는 요리로 코끝이 뻥 뚫리는 강한 맛이 일품이다. 여기에 주인장이 직접 담근 막걸리라도 한 잔 더하면 금상첨화. 명함에 '쬐그만 집이지만 맛이 큰집'이라고 적혀 있으니 작은 음식점 순라길에서 황홀한 우주의 맛을 보고 가는 셈이다.





◆ 사람 생각 술 생각나는 날이면 찾는 피맛골

어둠이 내리고 유독 사람 생각에 술 생각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가는 곳. 맛골목의 원조 격인 피맛골은 서울의 중심인 종로, 고층빌딩과 도로망이 엉켜 하루에도 수천수만의 시민이 왕래하는 종로통에 자그마한 뒷골목이다. 두 사람이 어깨를 비집고 걸어가기도 힘들만큼 좁은 이 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양반과 평민의 계급 구별이 뚜렷하던 조선시대, 종로통은 높은 사람들의 교자(轎子)나 가마가 지나가는 길이었으니 '헤이~ 물럿거라! ○○대감 행차시다!' 하는 소리가 들리면 길 가던 아낙네부터 무거운 짐 짊어진 남정네까지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하루벌이 생활이 바쁜 민초들은 가야 할 길이 바쁜데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또다시 높은 양반이 지나가니 종로를 지나는 일이 매우 힘들었다. 하여 말 한 마리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종로통 뒷골목을 이용하게 되었으니 피맛골의 어원은 말을 피한다는 피마(避馬)에서 온 것이다. 피마는 한자이고 골은 우리말로, 가운데에 사이시옷이 들어간 것이다. 많은 사람이 '맛있는 집이 많은 골목'이라고 생각하는데 민초들이 애용하는 길이라 가벼운 주머니로도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목로술집, 모주집, 장국밥집이 자연스레 생겨났고 허름한 국밥집에 들러 배를 채우고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였던 곳이라 그리 틀린 추측도 아니다.

지금도 다를 바 없이 자욱한 연기 속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막걸리 한 잔 기울이는 사람들의 모습, 그것이 바로 피맛골의 분위기다. 그중 '열차집'은 한국전쟁 직후 개업해 오늘에 이른 선술집으로 땟국 찌든 천장과 벽면, 막걸리가 열차집의 부품이다. '청진동 해장국'을 비롯한 많은 집이 피맛골을 떠난 지금,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걱정하지만 그래도 아직 갈 곳은 남아 있다. 3평 남짓한 '소문난 집(일명 삼경원)' 역시 벽면 가득 적힌 낙서와 시구가 분위기를 북돋우는 곳이다. 더불어 분위기를 잔뜩 띄워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막걸리다. 갈증이 나던 터, 힘이 빠지던 터에 꼴꼴꼴 막걸리를 따라서 벌컥벌컥 한 사발 단숨에 들이켜며 입가에 뚝뚝 떨어지는 술 방울을 훔쳐내면 '카아' 소리가 절로 나온다.

서로 어깨가 스칠 만큼 좁은 골목길은 그래서 더 정겹고 익숙한 추억의 맛집은 고향에 온 듯 편안하다. 마음속 무거운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그저 좋은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추억을 곱씹는 골목 안 맛집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글 & 사진 | 이동미(여행작가 chorani7@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