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방

잊혀진 우리차 - 고흥 천지차

아기 달맞이 2010. 5. 4. 07:56

잊혀진 우리차 - 고흥 천지차

천지단차 생산지, 팔영산

글 - 최석환 

 


전라남도 고흥에 차문화 바람이 불고 있다. 고흥은 유자의 발상지일 뿐만 아니라 최근 우리나라 우주항공산업의 메카로 부각되면서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또한 5월 우주항공축제 기간 동안 우주와 차의 만남이란 주제로 도공천도재를 비롯 다양한 차문화 축제가 진행된다. 이는 고흥이 조선시대 왕실의 진상품인 천지차(天地茶)의 생산지로 알려지면서 차문화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예부터  매년 천제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백두산의 백산차(白山茶),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백월산 죽로차, 허균이 말한 작설차(雀舌茶), 보림사 부근에서 자란 보림차 등 다양한 차가 전해왔다.

 

제다 방법 또한 구증구포(九蒸九曝)를 비롯 다양한 제다법이 전해져 왔다. 그 중에서 세인들에게 덜 알려진 천지차(天地茶)가 경가사(慶伽寺)와 수도원(修道院) 옛터에서 만들어졌던 사실이 최근 새롭게 밝혀졌다.

 

 

 

 

 

 

 

 

우리 민족의 차, 천지차


최근 고흥에서 우리차문화사에 새로 쓸 역사적 사건 두 가지가 연이어 일어났다.

 

첫째는 고비끼다완(粉靑茶碗)의 고향인 운대리(雲岱里)에 대한 학술토론은 개최한 것이고,

둘째는 조선시대 왕실의 진상품이었던 천지단차(天地團茶)의 생산지가 고흥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로써 차문화에 있어 보성에 한발자국 밀려있던 고흥이 도자와 차를 결합하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차문화의 새로운 현장으로 부각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고흥문화원이 주관한 제1차 고흥 운대리 도요지 학술회의가 열렸다. 주된 내용은 고흥 운대리 도자문화의 성격과 발전 방향에 대한 종합검토였다. 고흥 운대리에 대한 첫 학술토론이란 점에서 주목받았던 이 날 행사는 충북대 강경숙, 명지대 윤용이 교수를 비롯 도자 사학계의 쟁쟁한 학자들이 모여 서로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접전이 초반부터 계속 되었다.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도요지는 일찍이 일본인이 주목했다. 운대리 일대는 고려 초기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대규모 도요지였다. 이 곳에서 생산된 다완은 고비끼다완으로 이도다완 만큼이나 소중한 것으로 1985년 전라남도 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기 전까지 일본인들이 한국도자기 관광단을 조직하여 무차별로 도자기 파편을 유린했던 가슴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운대리가 고비끼의 고향으로 알려지면서 그 곳에 새롭게 가마를 연 사기장 신경균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비끼다완의 고향으로 운대리를 널리 알려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 필자는 오래 전 문헌을 뒤지다가 천지차의 생산지가 고흥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고비끼다완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했다.

 

그 뒷날 필자가 지목한 경가사터를 확인한 그들은 고비끼다완과 천지차와 연관성이 있다는 심증을 필자에게 전해왔다. 그러나 취재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침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이하 민예총)의 최경필 사무국장이 5월 우주항공축제 기간 동안 차와 도자기를 접목시켜 보자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 뒤 지난 23일 민예총과 문화원 관계자들과 함께 천지차의 생산지를 찾아나섰다.

 

 

 

 

 


천지차 생산지는 팔영산이었다


전남 고흥군 전암면의 경가사와 두원면의 수도원은 천지차의 생산지다.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 시기 화의가 성립되자 조선은 3회(1627, 1629, 1636)에 걸쳐 후금에 천지차 10봉(封)을 예물로 보냈다. 또한 광해군 8년(1616) 순천부사로 부임한 이수광(李야光)의 『신증승평지(新增昇平誌)』에는 작설차 1근 5전과 천지차 2근이 왕실의 진상품으로 바쳐졌다는 기록이 있다.

 

일찍이 교산 허균(1599~1618)은 호남지역 왕실의 진상품으로 ꡐ작설차는 순천산이 제일이고 그 다음 변산이다〔雀舌茶手順天者最佳邊山次之〕ꡑ라고 했다. 인근 보성에서 1939년 일본인 기술자가 차 재배를 시작된 탓에 고흥의 천지차는 역사속으로 매몰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지난 23, 24일 천지차 학술조사단은 최경필 고흥민예총 사무국장, 다도회의 정경희 씨, 조영석 고흥문화원 사무국장, 화가 선호남 씨와 필자등이 함께 경가사터인 팔영산 일대를 조사했다. 처음 조사에 난색을 표한 민예총 관계자들은 지난 해 야생염소 20여 마리가 찻잎을 뜯어 먹어 답사해봐야 헛고생이라고 했다. 그러나 필자가 이번 고흥차 특집이 천지차이니 찻잎이 없더라도 답사해 보자는 제안을 해 현장 확인이 감행 되었다.

 

마침 고흥문화원의 조영석 사무국장이 대학시절 차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차에 매료된 시절, 팔영산 일대를 조사한 바 있어서 현지 조사가 수월해졌다. 그가 길안내를 앞장섰고 필자와  민예총 관계자들이 뒤따랐다. 

 

24일 일찍 고흥 시내를 벗어나 전암면 백운동 계곡에 이르렀다. 눈발이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휘몰아치는 가운데 팔영산 주변의 계곡부터 조사하기로 했다. 조선시대 이 일대에 대규모 차밭이 조성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역사적 현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계곡에 위치한 차나무는 염소에게 찻잎을 다 따먹히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아쉬움을 남기며 계곡을 건너자 차나무 몇 그루가 동백나무와 함께 군락을 이룬 것을 확인한 뒤 서둘러서 백운동 계곡을 찾아나섰다. 백운동 계곡 입구에서 전방 5km에 이르는 차나무 역시 찻잎은 모두 염소에게 먹히고 가지만 있었다. 백운동 계곡 5km를 벗어나 정상 부근에 이르자 염소의 습격을 받지 않은 천지찻잎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천지차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천지차는 녹차가 아닌 단차였다


차의 제다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가마에 쪄서 말리는 방법의 덖음차류가 있고 병차로 찻잎을 가루내어 엽전모양과 같이 만드는 방법이 있다. 천지차는 후자로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쓰는 덖음차류와는 다른 방법이다. 주로 고려때 유행했던 뇌원차나 승설차(勝雪茶) 등이 이에 속한다. 이 땅에 단차류와 전차가 만들어진 곳은 주로 사찰을 중심으로 한 남도 땅으로 강진의 무위사나 보림사 등지에서 만들어졌다.

 

보림사의 돈차(錢茶: 엽전보양의 차를 말함)를 청태전(靑苔錢)이라 불렀다. 1938년 봄까지 만들어졌던 청태전은 보림사 밑 사하촌에서 녹차를 만들고 있는 이정애 할머니(79)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이 되기 직전까지 돈차가 있었다.

 

천지차는 먼저 끊는 물에 데치거나 쪄낸 후 절구에 넣고 찧어서 둥근 원모양처럼 만들어 건조시켜 둥글넓적하게 주먹만한 크기로 만든다. 이것을 적당량을 찻주전자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내면 초록빛을 띠는 훌륭한 맛의 차가 된다고 한다.

 

고흥군은 우주 축제 직전 4월말이면 팔영산에서 찻잎을 따서 운대리의 이름없는 조선 도공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천도재를 거행한다. 천지차로 만든 차 한잔을 조선 도공에게 바치고 선조도공과 천지차를 만든 선조의 넋을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한다고 한다. 국가에서 진상되었고 청나라에 수출되었던 천지단차가 370년 만에 다시 복원되는 것이다. 이는 고흥군민의 자랑임과 동시에 한국차의 자존을 세우는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조영석 고흥문화원 사무국장이 말하는 천지단차(天地團茶)


차나무의 분포를 사찰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차문화가 사찰에서 꾸준하게 유지되어 온 것으로 볼 때 고흥지역에서도 차나무의 생육을 사찰 주변을 중심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유력한 곳은 제석사 터와 사찰이 두 곳이나 분포한 팔영산인데 현재 제석사 주변과 팔영산 백운동 계곡 주변에는 상당한 규모의 차나무가 분포하고 있어서 고흥의 차문화 연구에 중요한 키포인트가 되고 있다. 팔영산 주변의 분포 상황은 필자의 조사로는 백운동 저수지 안쪽에서부터 시작해 옛 절터부근인 해발고도 400m까지 이어진다.

 

절터 주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총 면적은 3000평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밀식도가 떨어져 면적 자체는 그리 중요한 개념이 아니다. 차나무의 상태로 볼 때 야부기다나 베니호마레 등의 외산종이 아닌 것은 확실하며 그 시기는 꽤 오래 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상부에는 수령이 오래된 차나무가 있고 하부쪽에는 90년대에 인위적으로 재배한 소규모 차밭도 있다. 계곡을 따라 하류쪽으로 차나무의 생육이 이어지는데 분포상황으로 볼 때 상부쪽의 차나무의 차씨가 떨어져 물에 의해 자연적으로 분포지의 확산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차나무는 자연적 조건에서 분포지의 확산이 매우 더딘데(연구에 의하면 10년에 1m의 확산도 어렵다고 함) 이곳은 원분포지에서 수백미터 하류까지 분포되어 있다.

 

단차는 제조 방법상으로 볼 때 한국 차문화 전개의 초창기를 점하고 있는 차 가공품의 한 종류이다. 현대인들이 마시는 불발효차인 녹차와는 그 제조 방법과 맛, 수색이 확연히 구분된다.

 

만드는 방법은 먼저 끓는 물에 데치거나 쪄낸 후 절구에 넣고 찧은 것을 틀에 넣거나 손으로 빚어서 그 형태를 만들어 건조시킨다. 빚은 형태에 따라 병차(떡차), 전차(돈차) 등으로 불린다. 마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보통은 불에 익혀서 가루로 만든 다음 물에 풀어서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