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나무 숲길이 짙은 녹색을 뽐냈다
칼바람 막으려 꽁꽁 싸매고 다니는 날이 계속되던 무렵, 제주도는 벌써 봄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서울은 3월 달력을 펴야 비로소 봄 느낌이 나지만 제주에는 이미 2월 초입부터 꽃소식이 전해졌단다. 긴 겨울이 슬슬 지루해지던 에디터는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질 봄 풍경을 한발 빨리 눈에 담고 싶어 부랴부랴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 공항을 나와 동부해안도로를 달리며 차장 밖 바다를 보니 그야말로 봄이었다. 볕 잘 드는 곳에는 벌써부터 수선화가 한 뭉텅이씩 자리를 잡았고, 서귀포로 향하는 1119번 지방도로에는 삼나무 숲길이 짙은 녹색을 뽐냈다. 서울에서 불과 50분 거리인데도 거기는 다른 세상이었다. 3월 앞둔 제주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패딩 점퍼나 코트를 단단히 여민 제주 사람과 적당한 두께의 카디건만 걸친 외지 사람. 라디오 뉴스에서는 이날 제주의 온도가 영상 4도임을 알렸다. 칼바람과 눈발에 두 달 넘게 시달렸던 터라 이 정도면 제법 따듯하다고 느꼈지만, 제주 토박이들은 아직 몸을 움츠릴 정도였나 보다. 에디터가 제주를 찾은 게 2월 8일이니 지금쯤이면 그네들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졌겠다.
성산일출봉에 유채가 얼굴을 내밀다
제주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봄 그림은 누가 뭐래도 유채다. 여기서는 꽃가게에서 유채꽃을 청하면 별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길마다 지천으로 널린 게 유채꽃이니 마음껏 꺾어 가면 그만이라는 얘기다.
이맘때 유채 풍경이 제일 예쁜 곳은 성산일출봉과 산방산이다. 그중 먼저 꽃을 피우는 곳이 성산 쪽이라기에 우선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2월 둘째 주인데도 일출봉 초입에는 이미 유채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일찌감치 씨를 뿌려 한발 빨리 꽃망울 피운 곳도 있고, 햇빛이 워낙 잘 들어 성미 급한 ‘자연산’ 유채가 일찌감치 고개를 든 곳도 많다.
일출봉 맞은편에서 꽃구경을 하는데, 너른 유채밭 가꿔놓은 할매 한 분이 “어제도 방송국에서 유채를 찍어 갔다”며 꽃밭 자랑에 여념이 없다. 알고 보니 꽃길 한가운데 포토존을 만들었으니 1000원 내고 사진을 찍으라는 흥정이다. “예전에는 웨딩 촬영하는 예비 부부들이 너나없이 유채밭을 찾았는데, 요즘은 관광객 푼돈 수입이 고작”이라는 말에 마음이 동해 유채밭 한가운데서 기념 촬영을 했다. 학교 운동장만 한 샛노란 꽃밭을 가만히 내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거워졌다. 아이를 목말 태운 아빠와 엄마, 세 식구가 활짝 웃으며 사진 한 장 찍으면 딱 좋은 곳이었다.
올레에서 만난 서귀포의 봄
제주에서 제일 먼저 봄소식이 전해지는 곳은 남쪽 해안을 따라 들어선 서귀포와 중문관광단지다. 에디터의 목적지도 바로 거기였다. 제주의 첫봄을 맞은 서귀포에서 올레를 걸어볼 요량이었다. 지금 제주도에는 15갈래의 올레길이 관광 트렌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서귀포에서 중문까지 이어지는 바닷길은 올레 6코스와 7코스, 8코스다. 제주 사람들은 이 길을 ‘서귀포 70리길’이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봄 풍경이 으뜸인 곳은 올레 7코스다. 외돌개에서 시작해 강덕항을 거쳐 월평까지 이어지는 바닷길. 들꽃과 억새 등이 변화무쌍하게 어우러지며 바다와 조화를 이룬다. 총 15.1km로 천천히 걸으면 5시간 정도 걸린다.
에디터도 그 길을 걸어봤다. 7코스 중 바다가 제일 가까이 보이는 법항포구부터 강정항까지 2시간을 걸었다. 이 길은 최근 드라마 ‘추노’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바다와 꽃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잘 닦인 산책로와 적당히 험한 돌밭길이 조금씩 섞여 걷는 재미가 있었다. 검은 현무암 사이로 군데군데 솟은 유채, 길 곳곳에 숨은 갈대숲과 크고 작은 나무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이맘때면 해녀들이 올 한 해 사고 없이 물질 잘하게 해달라며 마을 곳곳에 불 피우고 제를 올리는데, 운 좋은 뚜벅이라면 그 모습을 구경할 수도 있다.
제주에서도 먼저 따듯해지는 효돈마을
이곳 관광지들은 유명세 탓에 서울내기의 귀에도 그 이름이 대부분 익숙하다. 하지만 마지막 제주 여행을 2007년 즈음, 혹은 그 이전에 한 사람이라면 ‘쇠소깍’은 상대적으로 생경할 터다. 쇠소깍은 최근 2~3년 사이 부쩍 유명해진 곳으로, 서귀포시 하효동 근처를 흐르는 자연 하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여기서는 민물과 바닷물이 한데 어우러져 물이 맑은 초록빛을 낸다. 처음 보는 풍경이 신기한데 물길 옆으로 굽이굽이 들어선 바위 절벽과 계곡 경치까지 아름다워 한동안 눈이 즐겁다. 통나무를 엮어 만든 전통 뗏목 테우를 타도 재밌고, 바닥이 투명한 배를 타고 녹색 바닷물 구경하며 계곡 사이로 노 젓는 재미도 쏠쏠하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계곡은 봄이 아니더래도 늘 푸르다. 하지만 초록빛이 가장 연하고 아름답게 물드는 계절은 바로 지금이다. 계곡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곳곳에 핀 진달래 군락도 지금부터가 제일 예쁘다. 쇠소깍이 있는 효돈마을은 서귀포의 동남쪽 끝에 위치해 있어 제주에서도 가장 날씨가 따듯한 곳으로 꼽히니 남쪽 바다의 봄을 느끼기엔 딱 좋다. 외돌개와 천지연폭포 등 서귀포의 유명 관광지와도 가까우니 일석이조다.
봄동 갈칫국은 미각 발견이더라…
봄을 굳이 풍경에서만 찾을 이유는 없다. 겨우내 땅 밑에서 숨죽였던 제철 먹을거리로 맛낸 음식을 먹으면 또 다른 봄을 느낄 수 있다. 에디터는 5년 전 제주로 내려가 터를 잡은 지인에게 지금 꼭 먹어야 할 봄맛을 추천해 달라고 졸랐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여행지 맛집 전문 파워 블로거로 이름을 날리는 이다. 그 지인은 봄동과 월동 배추로 산뜻하게 맛낸 갈칫국을 추천했다. 갈칫국은 맑은 국물에 넉넉한 생선살이 어우러진 제주 전통 먹을거리다. 갈치와 함께 넣는 채소들이 제철을 맞았으니 지금 맛이 제일 좋다는 게 그이의 귀띔. 특히 4월 이후가 되면 겨울에 잡은 갈치를 냉동해 뒀다 내놓는 물량이 많으니 싱싱한 생물을 원하면 3월이 가기 전에 꼭 맛보라고 조언했다. 너무 물컹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끓여낸 채소가 산뜻한 맛을 내고, 큼직하게 썰어 넣은 노란색 단호박과 녹색 봄동의 조화는 눈도 즐겁게 한다. 봄동과 월동 배추로 맛낸 갈칫국은 지금이 제일 맛있다. 제주공항 옆, 서부두수산시장에 물금식당(064-722-2772)를 비롯한 유명한 갈칫국집이 모여 있다.
3월의 제주에서는 또 뭘 먹어야 할까. 사실 해물과 생선은 봄보다는 겨울에 맛이 더 좋아서 아쉽게도 선택의 폭은 좁다. 하지만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제주 연안에서만 잡히는 옥돔 물량이 가장 풍부하고 맛있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니까. 옥돔은 회로 즐겨도 좋고 햇볕에 반쯤 말린 후 참기름 발라 구워 먹어도 좋다. 제주의 대표 특산물 중 하나인 한라봉의 당도가 제일 높아지는 시기도 구정 이후부터 3월 중순까지다. 지금 한창인 유채잎 따서 겉절이를 담가도 별미다. 새우젓과 고춧가루, 대파와 마늘 잎사귀 등을 넣고 잘 버무리면 새콤한 봄맛이 느껴진다.
초봄이 요트 투어엔 꽤 어울린다는 꼬드김
제아무리 기온이 높아도, 바람 독하기로 워낙 유명하니 제주의 겨울바다는 아무래도 가족 여행지론 부담스럽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기분 좋게 상쾌하고, 배 타고 멀리 나가 갑판에 서도 외투가 필요 없으니까. 에디터는 서귀포의 봄 풍경을 실컷 구경한 다음 중문관광단지에서 요트를 탔다. 햇살이 너무 따가운 여름보다 선선한 봄날이 요트 투어엔 훨씬 잘 어울린다는 꾐에 넘어가서다. 이곳은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구준표와 금잔디가 사랑을 확인한 장소이고,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김현중과 황보가 데이트를 한 곳이기도 하다.
요트 타고 바다로 나가 일출 보고, 중문 바닷가 중 경치가 제일이라는 주상절리 앞에 배를 세운 다음 낚시를 하거나 바닷바람 맞으며 와인 한잔 기울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바다에서 바라본 녹색의 제주도, 이제는 더 이상 차갑지 않은 순한 바람도 봄을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어느덧 제주는 외지 관광객의 오감을 온통 자극할 만큼 봄이 완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