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식의 유래
다식은 송화(松花)가루, 검은 깨, 쌀가루 등의 식물 전분질을 꿀에 개어 「다식판」이라는 틀에서 박아낸 일종의 과자이다. 다식이란 말은 고려말기 목은(牧隱)의 시문집(詩文集)에 종덕부추(種德副樞)가 팔관개복다식(八關改服茶食)을 보내어 읊은 시제(詩題)에 처음 나타난다. 당시의 국가적인 행사에서 다식을 사용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기에는 병과(餠果)로서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말기에 다식이 처음 만들어졌다고 볼 수는 없는데 그것은 다식의 원형으로 보이는 단다(團茶, 병다)가 고려 초기부터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다식은 가례(家禮)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서 제사를 지낼 때는 으레 향을 사르고 생(牲), 과(果), 포해(脯彖), 소채(蔬菜) 등과 갱반(羹飯), 다식 등을 제사상에 얹어 놓고 점다(點茶)로서 삼헌(三獻)을 하여 제를 지냈다. 이 다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지만 「다례」와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다식의 근원에 대하여 육당(六堂) 최남선은
「다식은 다례의 제수(祭需)요 다례는 지금처럼 면과(**果)로써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점다(點茶)를 하던 것인데 다 가루를 다잔(茶盞)에 넣고 반죽하는 풍속이 차차 변하여 다른 식물질의 전분등을 애초에 반죽하여 제수(祭羞)로 쓰고 그 명칭만은 원초의 것을 잉전(仍傳)함이리라는 말로서 수긍되는 말이다」
또한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다식에 대하여
「다식은 아마 송조(宋朝)의 대소룡단(大小龍團)이 변한 것이리라, 다는 본래 전탕(煎湯)하는 것이지만 가례에는 점다(點茶)를 한다. 점다는 배중(盃中, 다잔(茶盞))에 다말(茶末)을 넣고 탕수(湯水)를 부은 다음 다적(茶籍)으로 휘젓는 것이다. 지금 제사에 다식을 쓰는 것은 점다의 뜻이지만 그 명칭만 남고 실물은 바뀌어 버린 셈이나 사람들이 속황(粟黃)가루 등으로 어조화엽(魚鳥花葉)과 모양을 만들어 쓰는 것은 곧 용단(龍團)이 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고하여 다식의 근원을 병다(餠茶)라고 밝히었다. 병다란 과자모양의 덩어리다(단다)인데 중국의 송대(宋代) 용봉단다(龍鳳團茶)가 수입되어 음용(飮用)되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봉단다에 대하여 초의선사(草衣禪師)도 『동다송(東茶頌)』에서 자세히 밝히었다.
「대소 용봉단다는 정위(丁謂)에서 시작하여 채군담(蔡君談)에 와서 완성되었다. 이 용단(龍團)은 향료와 다엽(茶葉)을 합쳐 떡처럼 만들었으며 그 떡처럼 된 표면에 용(龍)과 봉(鳳)의 문양을 새긴 다식판을 만들어 다져낸 것인데 그 위에 금빛을 입혀 만든다」
이 용봉단다(龍鳳團茶)는 고려에서도 귀히 여긴 까닭에 막대한 양을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또한 중국의 단다 이외에도 고려에서는 뇌원다(腦原茶)라는 병다가 생산되어 음용되었고 계란(契丹) 등에 예물로 보내기도 하였다. 또 성종(成宗) 때에는 최승로(崔承老)의 부의(賻儀)로 왕이 뇌원다(腦原茶)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註54] 이러한 병다는 모든 다례의식에 제수로 쓰이는 등 음다(飮茶)풍속의 주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다마시는 풍습의 쇠퇴에 영향을 받아 차츰 변화하여 다례의 제수로 굳어지면서 조선말기까지 내려왔다. 지금도 원만한 집에 한두개씩 가지고 있는 다식판의 여러가지 문양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는데 어조화엽(魚鳥花葉)의 문양이 바로 옛날의 용봉단다의 그것과 대동소이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식이 만약 다와 관련이 없는 단순한 과자였다면 왜 「다식」이라 이름지어졌을까 하는 점도 쉽게 넘겨버릴 수 없는 점인 것이다.
조선 고종 28년 2월 초 6일 조대비(趙大妃)의 「탄일다례상(誕日茶禮床)」에도 대다식과(大茶食果)를 비롯하여 오미자다식(五味子茶食),당귀다식(唐歸茶食), 율다식(栗茶食), 송화다식(松花茶食), 묵임자다식(墨荏子茶食), 청태다식(靑苔茶食) 등을 한 그릇씩 차렸다는 [註56] 것이 보이는데 위의 여러가지 다식 중에서 청태다식은 조선시대의 단다였던 것으로서 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단다(團茶)로 알려진 것으로는 고려시대의 뇌원다(腦原茶)와 조선시대의 청태전다(靑苔錢茶)를 들 수 있는데 뇌원다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기록들만이 남아 있어 전모를 파악키는 어렵다. 그러나 청태전다에 대해서는 1940년에 발행된 『조선의 다와 선(禪)』에 그 발견경위, 연대, 분포, 제조방법, 음다법 등이 실물사진과 함께 상세히 연구 · 기록되어 있어 당시 청태전다의 면모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전남의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전다(錢茶)(생긴 모양이 엽전같다 하여 전다)가 발견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단다란 『다경(茶經)』 『대관다론(大觀茶論)』 등의 고전에서만 보이는 하나의 물명으로만 알고 있었다. 고려 때 단다로서 뇌원다의 이름이 보이긴 하나 확실치 않았으며 당시 일반적 풍조로는 송대의 용봉단다를 수입하여 음용했다는 사적 기록만이 있을 뿐 그 후에는 단다의 물명은 없어지다시피 하였던 실정이 있다.
그런 단다가 조선후기에 「청태전다」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 단다의 재출현은 아무래도 한국차의 중흥조(重興祖)인 초의선사(草衣禪師)에게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겠는데 몇 가지로 나누어 그 이유를 찾아보면
첫째, 비록 청태전이라는 단어는 『동다송(東茶頌)』『다신전(茶神傳)』에 보이지 않더라도 초의에게서 다도의 영향을 받았던 정약용이 병다(단다)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을 보면 입하(立夏)에 만다(晩茶)를 따서 병다(餠茶) 2근을 만들어 보내라는 귀절이 있는 것으로도 확인된다.
둘째, 『조선의 다와 선』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전하는데 전남 나주군(羅州郡) 다도면(茶道面) 불회사(佛會寺) 주지(住持) 이학치(李學致) 스님은 단다를 만들었는데 그가 대흥사에 있었을 때 초의선사에게서 그 제법을 배웠다는 니승(尼僧)에게 배웠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대흥사에서는 초의선사 이후 계속하여 단다의 제법이 전해내려 왔음을 알 수 있으니 조선후기의 단다의 출현은 초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다는 구한말에 이르러 다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 한 예로 「조대비탄일다례상(趙大妃誕日茶禮床)」에 다른 병과류(餠果類)가 다식과 같은 취급을 받아 청태다식(靑苔茶食)이라 하여 다가 아닌 과자로 변해 상에 오른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직도 우리의 다례상(茶禮床)이나 다회(茶會) 등에 다식은 쓰여지고 있지만 그러나 이미 다식은 병다(餠茶)가 아닌 단순한 과자로 변해버린 것이다.
제조법
다식의 제조법에 대하여 기술해보면 재료로는 송화(松花) · 흑백임자(黑白荏子, 깨) · 쌀가루 · 밤 등이 주로 많이 쓰였고 그 외에 도토리 · 녹두분(綠豆粉) · 산약(山藥) · 오미자(五味子) · 당귀(唐歸) 등이 쓰이기도 했다. 위의 식물질의 전분 등을 볶고 빻아서 꿀에 개어 어조화금(魚鳥花禁)의 형태인 다식판에 찍어내는 것이 지금의 다식 만드는 풍습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효종 때의 『규호시의방(閨壺是宜方)』에는 조금 특이한 제법이 전한다.
「눗도록 볶은 밀가루 한 말에 꿀 한되, 참기름 여덟 홉을 섞어 만들어 놓는다. 기와속에 먼저 흰모래를 깔고 다음에 깨끗한 종이를 깔고 그 위에 다식을 벌려놓고 또 암기와로 덮고 만화(漫火)를 아래 위로 덮으면 익는다. 청주를 조금 넣어 만들면 심히 연하니라」
다식은 형태와 문양에 따라 그 쓰임새가 달라지기도 하는데 혼례 · 축하연 등에는 수축형(壽祝型)-수복부귀(壽福富貴)등의 길상(吉祥)을 뜻하는 것을 쓰고, 장제례(葬祭禮)에는 일반적인 화엽형(花葉型)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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