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미

신발의역사

아기 달맞이 2009. 12. 12. 23:59


까지 거슬러 올라가 19세기 말까지 이어져 내려온 ‘고또’는 우리 조상들의 대표적인 신발이다. 삼한 시대엔 삼으로 엮은 미투리가 나왔고, 신라시대엔 놋쇠로 만든 놋갓신을 왕이 신었다고 하는데, 백제 무열왕릉에서 철로 된 청동 신발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 후 통일 신라시대 당나라에서 유래되었다는 당혜가 이조 말엽까지 신겨졌는데, 서민들이 짚신이나 나막신을 신었다면 당혜는 왕족이나 벼슬아치 양반들이 신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조상 신발 중 특히 가죽으로 만든 마른신은 왼쪽과 오른쪽 구별이 없어 장시간 보행으로 불편했고, 가죽은 주로 노루 가죽을 훈제하여 신발로 신었다고 한다.
다양한 신분과 형태 용도로 구분해 신던 신발은 개화기가 되면서 양복과 함께 서구식 구두가 들어오면서 우리의 신발 문화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길이가 짧아진 양장과 통치마의 등장으로 1910년대 양말과 구두가 들어 왔지만, 극히 일부에만 소개되었으며 이 시기에는 전도 부인과 통치마의 개화 여성도 구두에 버선을 신고 다녔다. 당시의 신발은 부잣집 자녀들은 삼색의 아름다운 올로 된 미투리를 신었고, 서민의 자녀들은 짚신, 나막신이 고작이었으며 당시 미투리는 죄수들이 옥 중에서 삼은 것을 최고로 여겼다.

고무신의 등장은 1916년 전후에 일본 고베 고부상인들이 조선인용 고무신을 수출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1920년대 초 우리 고유의 당혜와 운혜의 모양을 딴 고무신이 소개되었고, 고무신이 등장하자 운혜나 당혜는 자취를 감추게 되고 고무신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바닥만 고무로 되고 울은 가죽이나 베로 만든 신발을 편리화, 경제화, 경편화라고 불렀으며 대단히 유행을 하고, 그로 인해 이 '고무 구두'를 만드는 공장이 많이 생겨났다.

이와 함께 1920년대에는 구두와 양말이 유행하였고, 여태껏 엄격하게 지켜지던 신분 표시로서의 신발의 역할은 점차 약해지고 실용적인 면과 옷과 어울리는 아름다움의 발산 도구로서 더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30년대 지방에서는 미투리나 짚신을 신었고, 그 외의 대도시에서는 고무신이 보편적이었으며 신 여성은 고무신 외에 운동화나 구두를 신었다.
각 시대에 유행하는 구두는 서구 패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서구의 유행과 나란히 가고 있는 현상이 시작되었다. 80년대 초반에는 세계적인 브랜드의 운동화가 도입되면서 운동화는 값싸다는 개념에서 벗어난 고가의 운동화가 청소년층에서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90년대에는 빠른 패션 주기와 함께 옷에 맞는 다양한 구두와 운동화가 혼용되어 신겨졌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키 높이 구두, 에어 조절이 가능한 운동화 등 각종 기능이 첨가된 신발이 등장하였고, 사이버 시대에 걸맞게 화려하고 대담한 디자인의 신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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