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미

한국의 맛/김치

아기 달맞이 2009. 12. 12. 23:58

국은 발효음식의 왕국이라 해도 좋을 만큼 우리 음식에서 장과 김치는 빼놓을 수 없으며 그 종류 또한 무척 다양하다. 수천 년에 걸쳐 우리 입맛을 지배해 온 김치는 이제 세계적인 음식으로 발돋움하며 세상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가고 있다. 김치의 제조 및 저장과정에 담긴 과학성이 검증되고 건강음식으로 새롭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의 산물 발효음식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최후까지 지켜 줄 보루다.
음식은 맛으로 먹고 맛은 혓바닥으로 감지한다. 혓바닥에는 특정한 맛을 감지하는 영역이 따로따로 발달돼 있는데, 이를 맛을 감지하는 영역이라 하여 미역(味域)이라 한다. 이를테면 소금 같은 짠맛은 혀끝에서 느끼고 쓴맛은 혀뿌리에서 감지한다. 인체의 부위는 쓰면 쓸수록 발달하고 쓰지 않으면 않을수록 퇴화하듯이 맛을 감지하는 미역도 매한가지다.

매운 음식을 많이 잘 먹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혓바닥에는 매운맛 미역이 발달해 있고, 매운 음식 못 먹고 안 먹는 일본 사람들 혓바닥에는 매운맛 미역이 퇴화돼 있다. 한데 우리 한국 사람의 혓바닥에는 딴 나라 사람들에겐 거의 퇴화하고 없거나, 있더라도 미미한 특정한 맛만 감지하는 한 미역이 별나게 발달돼 있다. 음식이 삭아서 우러나는 발효미(醱酵味)가 그것이다. 화학용어로 발효로 생성되는 아미노산 맛인 것이다.

한국 사람의 혓바닥에는 서양에서 말하는 오원미(五原味), 즉 짜고 맵고 시고 달고 쓴 맛의 감지미역보다 발효미역이 유전적으로 몇 곱절 발달돼 있다 한다. 그도 그러할 것이 우리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먹어 온 음식 가운데 80∼90 % 가 발효음식이니 발효미역이 유전적으로 발달, 정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발효음식의 두 기둥 ― 장류와 김치류

역사적으로 먹어 온 발효음식의 두 기둥이 장(醬)류와 김치류다. 장류는 간장·된장·막장·고추장·담뿍장·쪽장·집장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밥상에 오르는 모든 국이나 찌개류에 된장·고추장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또 그 밖의 모든 찬에 간장이 들어가지 않는 요리를 찾아볼 수 없다. 곧 한국 음식의 기조는 장이라 해도 대과는 없다.

삭힌 맛으로 먹는 김치도 배추김치·무김치·나박김치·열무김치·보쌈김치·총각김치·깍두기·물김치·동치미·파김치·쓴김치·갓김치 등등, 옛 어머니들이 서른여섯 가지 장과 김치를 담글 줄 모르면 시집 못 간다 했을 만큼 음식문화의 기조를 이루었던 게 발효음식이다. 그 밖에도 사시사철 달라야 했던 장아찌와 젓갈 등 한국은 발효음식의 왕국이었다.

한국 사람이 외국에 나가면 그 나라 음식에 맛을 못 붙이고 바로 한국 음식으로 돌아가는 맹렬회귀(猛烈回歸)는 유명하다. 외국 음식을 못 먹어서가 아니다. 외국 음식에는 발효미가 결여돼 있어 한국인의 혓바닥에 발달돼 있는 광약 고농도의 발효미역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또 만족하지 못하기에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아 불가피하게 발효음식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또 중국 음식 먹을 때 간장 찍어 먹는 민족은 한국 사람뿐이라 한다.
서양 사람은 물론 일본 사람마저도 중국 음식 먹을 때 간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많은 한국 사람들과 함께 중국을 여행한 일이 있는데, 중국에 가서 맨 먼저 배운 중국말이 간장 가져오라는 말이었다. 식당에 들어가면 여기저기서 간장 가져오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주인이 와서 우리 집 요리가 싱겁냐고 정색을 하며 묻던 일이 생각난다. 기름맛으로 중국 요리를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국인의 발효미역을 달랠 수 없기에 간장을 찍어 먹는 것이지 싱거워서가 아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발효음식

이민 3, 4 세가 사는 교포 집들도 다소 변질은 됐을망정 김치와 간장을 먹는 집이 반이 넘는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한국인의 발효음식에 대한 정체성과 유전질의 강인함을 절감할 수 있는 예다. 옷은 양복을 입고 사는 데 별반 저항을 못 느끼고, 집도 양옥에서 침대와 의자살이에 적응하고 살며, 사고도 서양식 사고에 곧잘 적응·동화하면서, 유독 먹는 것에서 이것이 더디고 느린 것은 민족 정체성을 최후까지 지키는 보루가 음식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발효미역인 셈이다.

10 여 년 전만 해도 외국 사람 앞에 김치를 내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치와 함께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다른 음식도 냄새가 난다고 꺼려했던 김치의 위상이 10 여 년 동안 급격히 달라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은 굴로 135 개국에서 먹는다. 한데 2 년 전 조사에 의하면, 김치를 먹는 나라가 111 개국으로 무저항 순위 5 위의 음식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벨지움 농촌의 시골 슈퍼마켓에서도 깍두기 통조림을 파는 것을 보았다.

다만 이처럼 무섭게 세상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가고 있는 김치의 세계 수요량 중 80 % 를 일본이 공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음식문화의 정체성이자 보고(寶庫)가 절도질당하고 있는 것이다. 된장을 일본말로 미조라 하는데 한국말 메주에서 비롯됐음을 일본 학자들이 공인하고 있다. 그리고 담뿍장을 낫도라 하는데 나라시대 이전에는 고려장(高麗醬)으로 불렸음도 자인한다. 곧 한국에서 건너간 이 발효문화를 저희네 것으로 삼아 저희네 이름으로 세계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빼앗기고 있는 것은 역사나 독도나 어장뿐 아니라 음식문화에서도 심각함을 알아야 한다.
: 이규태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마치고 전북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등을 거쳐 현재 같은 신문 논설고문이다.
저서에 『한국인의 의식구조』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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