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매암에서 수성대가는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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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용준 기자]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에 온 몸을 씻고 터벅터벅 한 걸음 한 걸음, 서두를 것도 없고 급할 것도 없다.
강가의 누렁이는 늦가을 햇빛에 늘어진 하품이 정겹고, 길가에 뒹구는 늙은 호박들은 고향내음을 풍긴다. 끝 간데 없이 겹쳐지면서 멀리 이어지는 지리산 능선들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다.
황금빛으로 물든 다랑이 논은 산과 마을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화전밭의 감자 한 톨에도 민초들의 삶이 묻어난다. 그리고 곧장 오르지 않고 애둘러 돌고 돌아 처음처럼 돌아온다.
지리산 둘레길은 3개도(전남, 경남, 전북), 5개 시ㆍ군(구례, 하동, 산청, 함양, 남원) 16개 읍ㆍ면과 100여개 마을을 품고 있는 800(약 320km)리의 장거리 도보길이다.
2011년까지 완성할 예정인 이 길은 10월 현재 주천~운봉, 운봉~인월, 인월~금계, 금계~동강, 동강~수철 등 5개 구간이 운영되고 있다.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마을길 등 사람들의 삶 속에서 생겨난 '생활길'이기도 한 이 길을 따라가면 기억의 저편에 있던 고향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오직 정상을 향해 오르고 다시 내려가는 길이 아니라 쉬엄 쉬엄 걸으며 마음의 여행을 즐기고, 지역의 고유한 역사와 삶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날 수 있는 그런 길이다.
지난 주말 전북 인월에서 경남 함양(3구간)을 이어주는 19.3km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다.
AM 09:00-10:20 전북 남원 인월-황매암-수성대(4.8km)
인월 지리산 둘레길 안내센터에서 월평마을 앞 강변길로 접어든다. 황금빛으로 물든 벼와 강물이 길배웅을 하며 나선다.
강가에는 어미를 따라 나온 송아지가 여유롭게 늦가을을 즐기고 있다. 저 멀리 언뜻 보이는 지리산 천왕봉 자락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중군마을에 들어선다.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담장을 지나면 담장넘머로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감들이 길손을 맞는다.
전투시에 전군(前軍), 중군(中軍), 후군(後軍)이 있듯이 임진왜란 때 중군이 이곳 마을에 주둔한 연유로 중군리로 불렸다고 한다.
중군마을에서 둘레길은 2곳으로 나뉜다. 하나는 임도를 따라 삼신암, 수성대로 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산길을 따라 황매암을 거쳐 수성대로 가는길이다. 황매암코스를 택했다.
농로를 따라 가파른 산길을 걸어 힘겹게 오르면 지리산의 능선들도 한 겹 한 겹 속살을 드러낸다. 조금은 힘든 오르막길이지만 운치있는 오솔길과 단풍 숲 길을 걸으면 육체의 피로는 저만치 사라지고 없다.
암자에서 마시는 약수 한 모금의 맛은 달디 달다. 이제부터 수성대까지는 유유자적 여유를 부려도 좋은 그런 길이다.
낙엽이 쌓인 흙길을 밟으며 바람소리, 새소리 벗삼아 길을 따라 내려서다보면 어느새 수성대계곡에 이른다.
이곳 물은 아직까지도 중군마을과 장항마을의 식수원으로 음용될 만큼 맑고 깨끗하다. 하지만 비가 많이 올 경우에는 물이 불어나 건너기 어렵다.
AM 10:30-11:40 수성대-배너미재-장항마을-매동마을(4.1km)
수성대 맑은 물에 한 숨을 돌리고 다시 고갯길을 오른다. 갈림길마다 나오는 이정표에 잠자리가 앉아 길을 안내한다.
10여분을 오르자 운봉의 배마을(주촌리)이 호수일 때 배가 넘나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배너미재다. 지리산 깊은 산속에 있는 배와 관계된 지명이라지만 높은 봉우리에서 바라보니 옛적 일이 실감나지 않는다.
낙엽림이 우거진 숲길을 벗어나자 고사리 밭, 감나무, 향긋한 들깨 밭이 눈에 들어온다. 절대로 농작물을 건드리지 말라는 재미있는 경고 문고가 그 앞을 지키고 있다.
둘레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농작물을 만졌으면 이렇게라도 써 붙여 놓은 농심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밭길을 돌아서자 수려한 풍모의 소나무 당산이 웅장하게 자리를 잡고 길손을 맞고 있다. 장항 노루목당산이다.
지금도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있을 정도로 신성시되고 있는 소나무는 천왕봉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리우고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장항마을에서 매동마을 지나기까지 시멘트길이 시작된다. 인월-금계를 잇는 둘레길 중 가장 운치 없고 힘든 구간이다.
AM 11:40- PM 2:00 매동마을-휴식-등구재(5.8km)
매화꽃을 닮은 명당이라서 매동(梅洞)이란 이름을 갖게 된 매동마을에 들어서자 울긋불긋 등산복을 차려입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매동마을에서 금계까지 10여km를 걷는 사람들이다.
등구재를 향하는 길은 수평으로 걷다가 잠시 오르막이 이어지고 또다시 마을쪽으로 내리막을 그리는 길이다.
들녘엔 조, 수수, 콩 등 온갖 곡식이 익어가고 물봉선화, 강아지풀이 길섶에 지천으로 피었다.
갈림길마다 일손을 멈추고 밝은 웃음으로 길 안내를 해주시는 농부들의 정성이 고맙다.
매동마을을 떠난지 1시간여분만에 이름도 정겨운 다랑이쉼터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막걸리와 부침개 등을 가지고 평상을 차지하고 앉아 지친 몸을 추스리고 있다.
드디어 숲에서 벗어나니 굽이 굽이 다랑이 논이 반갑게 모습을 드러낸다. 황금빛 다랑논을 기대했지만 군데 군데 추수를 마친 다랑논이 아쉽기는 하지만 한 평의 땅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 수직으로 쌓아 올린 논 축대가 이곳 민초들의 삶을 대변하는 듯 해 가슴이 찡하다.
이런 다랑이 논은 전북과 남원의 경계인 등구재 너머로 계속된다.
PM 2:10-4:00 등구재-창원마을-금계마을(4.3km)
등구재에 올랐다.
'거북등 타고 넘던 고갯길, 서쪽 지리산 만복대에 노을이 깔릴 때, 동쪽 법화산 마루엔 달이 떠올라 노을과 달빛이 어우러지는 고갯길. 경남 창원마을과 전북 상황마을의 경계가 되고, 인월장 보러 가던 길, 새색시가 꽃가마 타고 넘던 길'
등구재 안내판에 쓰여진 글이다. 옛적 숱한 사람들이 갖가지 기구한 사연을 안고 넘었을 등구재를 지금의 사람들은 수 많은 이야기를 품고 넘고 있었다.
재를 넘어면 바로 경남 함양땅 창원마을이다. 길은 평탄하고 좁은 오솔길은 빽빽히 들어찬 삼나무와 소나무들로 싱그롭다.창원마을까지는 다랑이논과 어우러진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며 걸을 수 있다.
마을 초입 고추밭에서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온다. "야이구야 힘들제, 일루 와서 사과나 하나 묵고 가라~뭐 그리 급히 갈기 있나"
70평생을 함양땅에서 사셨다는 임옥남 할머니가 둘레길을 찾는 길손들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있었다.
"내가 옛직에 새빅 호롱불아래서 밥묵고 짚세기 싣고 등구재 넘어 인월장보러 댕겨는디. 그 길을 외지 사람들이 넘어댕기는것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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