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전통가옥^^ 기품이 있는 조상의 터전...한옥을 찾아서

아기 달맞이 2009. 10. 9. 08:40



집이 사람의 삶을 담은 그릇이라면, 한옥은 한국인의 삶을 담은 그릇이라 하겠다. 가족 제도와 생활 양식이 변화하면서 보다 편하게 살 수 있는 기술들이 출현하고 있다지만, 한옥에는 다소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오랫동안 한국인들이 공유해 온 삶의 방식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서 재료를 얻은 한옥에 살면서 정서적인 풍족과 육체의 건강을 얻었고, 그런 생활을 통해 가족과 함께 안온하고 여유 있는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었다. 천편일률적인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넓은 평 수가 보통 사람들의 꿈이 되어버린 시대에 한옥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던 조상들의 삶의 방식을 새삼 일깨워 보기 위함이다. 단지 과거에 대한 향수나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복잡한 생활의 무게를 벗고 넉넉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살 수 있는 작은 여유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한옥은 보다 살기 편하게 변화하면서도 여전히 한국인의 정신을 담고 있는 우리의 터전이자 과학적이고 현명하게 축조된 주거 공간이다. 대청마루에서 더위를 식히고 온돌방에서 잠을 자는 한옥 체험이 늘어 가는 요즈음, 이번 테마를 통해 한옥에서 사는 소박한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란다. 한옥에 담긴 그 깊은 뜻과 상징을 이 짧은 페이지 안에 어찌 다 담아낼 수 있을까, 그저 편리함만 추구하는 시대에 한옥이 주는 쉼과 여유의 의미를 작게나마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옥은 말 그대로 ‘한국의 가옥’이다. 한옥은 보통 조선시대 양반 가옥으로 알고 있지만, 뿌리를 따지면 이보다는 더 오래되었고 그 범위도 더 넓다. 한반도에서 오랜 기간 사람들이 살면서 자연환경, 문화, 사상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공통적 주거 형식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조선시대 들어서 정형화된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현재 조선 이전의 주거 유구는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긴 하나, 고려 후기에 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옥의 전형인 조선시대 형식에 근접하게 된다. 계급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반드시 양반만의 가옥일 필요는 없다. 흔히 ‘민가’라고 하는 중하층의 주거에도 한옥 요소들이 일부 이기는 하나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한민족의 가옥을 구성한 것이니 한옥은 이것을 통칭하는 말이다.
최근 한옥 열풍이 불고 있는데, 그 방향이 점점 규모가 크고 형식도 어느 수준 이상이 되는 ‘고가의 부잣집’으로 잡혀가고 있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작은 규모의 개인집에 전통 민가의 특징을 섞으면 그 또한 한옥을 현대화한 훌륭한 예에 해당된다. 단, 좁혀 보자면 한옥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 가옥으로 한정 지을 수 있다.
한옥을 낳은 배경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웅장하지는 않으나 변화무쌍한 산과 강, 사계절이 뚜렷하면서 해가 좋은 빛, 겨울에는 서북풍이 불고 여름에는 남동풍이 부는 바람 등이 자연환경적 요소이다. 문화적 요소로는 상대주의 국민성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고 그때그때 각 집마다 사정에 맞춰 개성을 충분히 살린다는 뜻이다. 사상적 요소는 고려시대 때 융성했던 노장사상이 제일 큰 밑바탕을 이루며 여기에 유교의 형식미가 가미되면서 완성되었다. 고려시대 주거지 외형은 조선시대의 한옥과 유사하나 많이 단순해서 변화무쌍하고 아기자기한 한옥 특유의 특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 차이는 유교 형식미의 유무에 따른 결과다. 원래 유교 형식미는 매우 엄숙하고 정형적이지만, 이것이 노장사상 및 한국적 상대주의와 합해 지면서 규칙적이면서도 동시에 변화무쌍한 다양성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융합 또는 통섭의 좋은 예일 수 있는데, 실제로 노장사상과 유교사상의 영향권 아래 드는 한·중·일 삼국의 주거를 비교해 봐도 한옥이 제일 변화무쌍한 특징을 보인다. 더 근원적으로 따지자면 유교와 노장은 서로 반대편에 서는 사상인데, 이 둘을 하나로 합해서 규칙적 정형성과 변화무쌍한 다양성을 동시에 얻어 낸 예는 한옥이 유일하다. 한국인 특유의 혼성 기질이 여지없이 드러난 대표적 예가 바로 한옥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옥의 구체적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러 가지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요약해 보자.
첫째, 한옥은 바람과 햇빛을 받아들여 이용하는 데 매우 뛰어난 가옥 구조를 자랑한다. 집 밖과 집 안에 그 비밀이 있는데, 집 밖에서는 자연 지세에 맞춰 집을 짓는 풍수지리가 그 비밀이고 집 안에서는 통(通)을 최대한 살린 배치 구도가 각각 그 비밀이다. 둘을 합해 보면 이렇다. 바람도 자동차처럼 다니는 길이 있는데 그 길목에 집을 짓되, 그것이 걸리적 거리지 않게 집을 짜면 집 안에는 항상 시원한 바람이 오가는 것이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늘 다니는 길로만 다니는데, 이를테면 해바라기처럼 거기에 맞춰 집도 쫓아다니면 집 안에는 항상 따뜻한 빛이 가득 찬다. 물론 겨울에는 바람을 피하고 여름에는 햇빛을 피하는 상식 쯤은 가장 잘 지키는 지혜로운 집이 또한 한옥이다. 바람은 여름에 유리하고 햇빛은 겨울에 유리하니, 한옥을 친환경 주택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둘째, 통을 살린 배치 구도는 곧 한옥의 공간적 특징으로 발전하는데 ‘물 흐르듯 막힘이 없는’구조가 그것이다. 문을 다 열면 각목으로 짠 상자 뼈대처럼 되는데, 여기서부터 문을 하나씩 닫을 때마다 집은 끊임없이 다양하게 변한다. 뚫리고 막히는 방향과 정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이쪽을 막고 저쪽을 뚫을 수도 있고, 이쪽저쪽 다 막고 요쪽만 뚫을 수도 있다. 가히 가변형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그것도 힘들이지 않고 창문 여닫을 힘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이 외에도 많은데, 중요한 것은 한옥의 특징들이 번호 붙여 나열할 성질은 아니라는 점이다. 서로 물고 물리면서 다양한 특징들을 추가로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통은 식구들 사이의 간접 의사 소통을 늘려주면서 동시에 집 안에서 환기와 통풍을 최대로 늘려준다. 사람 사이에 연락이 오가는 길과 바람이 통하는 길은 결국 같기 때문이다. 물 흐르듯 막힘이 없는 구조는 남향을 면한 벽의 면적을 늘려서 겨울에 햇빛을 집안 구석구석에 들이는 데 유리하다. 한옥은 마음만 먹으면 북향 방이 하나도 안 나오게 할 수 있는 구조를 갖는 가옥이다. 물 흐르듯 막힘이 없는 구조는 마당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효과도 준다. 사실 마당 없는 한옥은 흔히 하는 말로 ‘팥소(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마당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가회동의 도심 한옥만 가도 사람들은 좋다고 난리들인데, 마당을 맘껏 살린 시골에 있는 진짜 한옥은 도심 한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요즘 아파트에 싫증난 사람들이 한옥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옥의 특징을 충분히 알고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옥에 사는 진짜 의미를 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최소한 여름에 에어컨 없이 살아야 진짜 한옥에 사는 것이다. 껍질만 한옥처럼 지은 다음 통유리 붙이고 에어컨 달고사는 것은 한옥에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목조-기와-개인집’에 사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한옥이 절대선도 아니다. 한옥에 살아 본 적이 있는 어르신들은 불편한 점에 대해서도 많이들 말씀하신다. 한옥이 안 맞는 사람도 나올 수 있다. 신경이 예민하거나 프라이버시 침해가 정말 싫은 사람은 한옥을 피하는 것이 좋다. 한옥의 장점은 매우 세밀하고 섬세한 것이어서 적성에도 맞고 그것을 잘 알고 즐길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선물을 선사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다면 별 효과를 볼 수 없을 테고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다. 한옥은 마치 다도(茶道)와도 같다. 티백으로 된 녹차 마신다고 어디 가서 다도라고 말할 수 없듯이, 한옥에도 도가 있어서 이것을 지키고 즐길 줄 알아야 한옥에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건축 공간을 창조하는 행위는 자연이나 외부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은신처로서의 기능을 위한 것이었다. 그 은신처가 바로 ‘집’이라는 구조체인 것이다. 집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삶의 터를 제공하면서 자연 환경 요소에 대해 적응 및 대응하게 하는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든 땅 위에 집을 지었다면 바닥은 맨바닥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지형적인 특성, 즉 ‘반도’라는 특성은 대륙적인 요소와 해양적인 요소가 같이 자리잡을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사계절이 뚜렷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더위와 추위에 함께 적응할 수 있는 구조. 즉, ‘마루’와 ‘온돌’을 둔 것이다. 한국 주거의 마루와 온돌은 추위와 더위에 적응하는 상반된 기능을 가졌다. 마루와 온돌이 한국 주거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것은, 우리 기후에 가장 적합한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루는 지반면에서 떨어져 나무로 만든 공간을 둠으로써 바닥면의 습기나 바람이 통하게 하는 구조이고, 온돌은 아궁이에서 불을 때 그 열기로 구들을 데워 온기를 받아들이는 구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루와 온돌을 통해 고온 다습한 여름과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었다.



마루의 가장 우선적인 효용은 지면으로부터의 습기를 피하고, 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차단하며, 앞뒤 통풍을 위한 기능을 가진다는 점이다. 마루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정확하게 고증을 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조선시대에 오면서 마루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게 되는데, 그 용도나 구조 기법에 있어서 상당한 발전을 보인다. 주거 건축에서 상류 주택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일반 민가에서도 오래 전부터 방 앞으로 작은 마루를 내어 안과 밖을 연결해 쓰기도 했다. 주거뿐만 아니라 다른 건축물에서도 마루가 사용됨으로써, 외기의 완충적 효과를 꾀한다거나 목조의 촉감과 탄성으로 충격을 덜어 준다는 이점 외에도 다른 재료에 비해 우리에게 정감을 주는 구조로 인식된 것이다.



기능적으로 보면 마루는 마당 쪽으로 개방돼 마당과 엇물리는 공간이 된다. 내부 공간의 엇물림은 건축적 공간성을 높여 주는 우수한 방법이다. 한정된 내부 공간을 외부로 확장하거나 외부 공간이 내부까지 들어올 수 있는 신축성 또는 탄력성을 공간에 부여하는 우수한 연결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앞마당 쪽으로만 개방된 것이 아니라 뒷문을 열면 후원과도 연결되면서 상호 관통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마루는 외부와 내부 공간을 이어 주는 반 외부 공간인 동시에 평면적으로는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고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는 매개 공간이라 볼 수 있다. 마루는 형태상으로는 고상식(기다란 나무 기둥이나 돌 기둥을 이용해 마루를 높게 만든 형태)이고, 기능적으로는 여름에 습기를 피하면서 조망과 휴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신이 만나는 신성한 공간으로도 볼 수 있다. 집 전체를 관장하는 성주신의 성주 단지를 모시는 곳도 마루이고, 관혼상제를 치르거나 조상을 모시는 사당 역시 마루이기 때문이다.



여름의 공간인 마루와는 달리 겨울을 나기 위한 온돌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바닥 밑의 구들을 데워 그 열이 인체에 직접 전달되거나 실내의 공기를 덥히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 온돌에서 뛰어난 과학성을 찾을 수 있다. 온돌은 우리의 습성에 맞는 난방 구조이며, 난방과 취사를 동시에 겸할 수 있고, 재는 비료로도 재활용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육식을 하는 서양인에 비해 채식을 주로 하는 한국인이 창자의 길이가 길어 체내 혈액이 대부분 상체에 모여 있기 때문에 하체의 체온을 위해 따뜻한 바닥에 앉아 생활해야 하는 ‘두한족열(頭寒足熱)’ 방식에 가장 적합한 것이 바로 온돌인 것이다.



온돌은 우리 몸에 침투하는 따끈따끈한 바닥의 적외선과 동시에 창호지를 통한 안팎의 열흐름이 항상 상쾌함과 개운함을 느끼게 해 준다. 즉 열의 전도, 복사, 대류를 이용한 한국 고유의 난방 방식인 셈이다.
이렇듯 우리 기후에 맞는 마루와 온돌은 우리 주거 건축에 정착되면서 뚜렷하게 상반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온돌은 흙이나 돌로 이루어진데 반해 마루는 나무로 되어 있고, 온돌이 폐쇄적인 공간 구조를 보이는데 반해 마루는 개방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마루와 온돌은 오랜 기간을 통해 선택과 적응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해 내려왔다. 그러나 온돌이 한국 전역에서 거의 절대적인 요소로 자리 잡은데 비해 마루는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고 그 유형도 지역이나 집의 규모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있다.
그 발생과 발달 경로가 각기 다른 두 개의 요소가 함께 존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의 절충과 진통이 있었지만, 추위를 나기 위한 온돌과 더위를 이기기 위한 마루의 자연 조절 기법은 서구 주택에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기능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여름, 우리는 대청마루에 목침을 베고 누워 부채로 바람을 일구며 여름 한낮 무더위를 달래곤 했다. 앞마당 쪽에서 불어오던 서늘한 한 가닥의 바람이 마루를 통해 뒤쪽 대발 친 바라지창으로 빠져나갈 때, 마루 바닥의 매끄럽고 서늘한 촉각은 한여름의 더위를 잊게 해 주었다. 그리고 겨울이면 온돌을 둔 방에 샛노랗게 기름 먹인 바닥의 여백과 가로세로 질서 있는 모양을 만든 창과 문, 그리고 윗목에 놓여진 고풍스러운 가구에서 볼 수 있는 질박함이 어우러진 그 집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정신을 길렀다. 그런 곳에 바로 마루와 온돌이 있었다. 위대한 미래는 찬란했던 과거와 접목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그 참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온돌과 마루에 담긴 우리네 전통적 가족 관계와 따뜻했던 인정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요즘, 우리가 이 평범한 사실을 너무 쉽게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자문해 볼 일이다.

 




어째 종일 날이 물쿠더니 한 차례 비가 쏟아진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에 간간이 섞여 마당을 건너오는 안채의 텔레비전 소리. 옛 영화의 지지직대는 듯한 그 소리를 듣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을까. 새벽 네 시 반, 누군가 마당을 가로지르는 소리에 눈을 뜨니 창호지 문을 통해 어슴푸레 돋을볕이 비쳐든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아흔한 살의 종부가 대문부터 연다. 그러고는 느릿느릿 요강을 비우고 비질을 한다. 이 집에서 평생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어기지 않은 일이다. 증손녀가 말하길, 그 시간에 대문이 열려 있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안단다. 객들만이 머물다 가는 입을 앙다문 고택이 아니라서 이곳엔 이야기가 꿈틀대고 삶의 냄새가 진득이 배어 있다. 명재 윤증(1629-1714)의 후손들이 숨 쉬며 살고 있어 집도 살아 숨 쉰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선 흙벽이 막고 서 있다. 그것은 첫 시선을 대각선으로 향하게 한다. 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주인과 객이 눈 마주치지 않으니 집안사람들의 사생활이 존중되고, 흙벽 밑부분은 오가는 발이 보일 정도의 공간이 뚫려 있어 마루에 앉아서도 누가 오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성리학 중에서도 예학의 대가인 윤증의 집인 만큼 위계 질서와 남녀 구분 등 예학의 이념에 철저하게 맞춰 지어진 집인 것이다. 그 뜻을 품은 짜임새가 어디 대문뿐이겠나.
우선 ㄷ자형의 안채를 보면 동쪽에는 집안에서 가장 바지런해야 하는 며느리의 방을 두고 있다. 해가 가장 먼저 드는 곳이기에 게으름을 피울 수 없는 방이다. 그러니 당연히 서쪽 방에 안방마님이 거처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채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머무는 방이 있는데 그 크기와 순서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 개의 방은 사생활을 위해 일자가 아니라 방향을 틀어 동선을 꺾어 놓았다. 또한 방과 방 사이에는 수발드는 아이가 머무는 쪽방도 있다.
ㄷ자형 안채와 사랑채가 튼 ㅁ자형으로 앉아 있으니 집안의 모든 안쪽 문과 바깥문을 열어 놓으면 안채의 깊은 대청에 앉아서도 누가 어디로 가는지 슬쩍슬쩍 다 보인다. 특히 여인들은 뒷간에 남자가 들어갔는지도 알 수 있었으니, 서로가 얼굴 붉힐 일은 없었지 싶다. 그리고 사랑채 누마루의 들창까지도 열어 다 위로 걸면 사방이 막힌 곳 없이 훤하다.
바람이 통하는 집이다. 이곳의 바람은 시멘트벽에 부딪쳐서는 더 거세져 빌딩 사이에 휘몰아치는 성난 바람이 아니다. 집 곳곳을 여여히 돌고 돌다가, 한 자리에 머물기도 하다가, 책장을 훅 넘기고 가는, 통(通)하는 바람이다. 그러니 이 집에선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그 모든 뜻이 어찌 통하지 않겠나.



모두가 말한다, 윤증의 성품을 똑 닮은 집이라고. 조선 후기 소론의 대학자였던 명재 윤증, 그는 여러 차례 임금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며 청빈하게 살았다. 그러나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상소를 올려 바로잡으려 애썼다. 출세를 위한 걸음은 아끼되 쓴소리는 아끼지 않았다. 그처럼 올곧고 간결한 집이다.
그러나 사실 윤증은 이 집에 기거하지 않았다고 한다. 윤증이 초가집에 살자 그의 제자들이 지어 머물기를 간청한 집이나, 윤증은 자신이 머물기엔 너무 큰 집이라며 들지 않았다. 누구나 더 큰 집을 바라는 세상, 집안 곳곳을 둘러보며 그의 소박함을 배운다. 그의 후손들 또한 그의 성품처럼 소박하게 살고 있으니. 사실, 고택이라고 하여 안동의 대가를 생각하며 찾아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마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조금쯤 실망스럽다. 소론의 대들보가 머물렀다고 하기엔 초라할 정도로 작아 그저 평범한 여염집 같다. 안동의 헛제사밥을 먹어 본 이에겐 이 집의 밥상만한 제사상도 초라해 보일 것이다. 떡도 전도 탕도 없는 소박한 제사상 또한 윤증의 뜻이다. 이 집 앞을 그저 쓱 스쳐 갔다가는,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는 다 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옥의 공기처럼 느긋이 앉고, 슬쩍 뒤척이기도 하며 하룻밤 묵다 보면 이 집의 품위와 깊이를 알게 된다. 작아도 옹골찬, 무엇 하나 함부로 들이지 않는 집. 이 집과 친해지고 싶어진다. 이 집을 닮고 싶어진다. 마치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위치적으로 봤을 때, 정치적 대립을 겪던 노론파의 대표적 건물인 노성 궐리사와 노성 향교 사이에 명재 고택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 다른 학자들이라면 피해 앉았을 위치에 제자들이 당당히 선생을 앉히려 했다. 숨지 않으니 솔직하고 통쾌하다.
과학적으로 봤을 때, 한옥이 가진 장점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특히 이 집에서 눈에 도드라지게 보이는 것이 하나 있다. 안채와 곳간채가 앉은 모습이다. 두 건물은 나란히 놓였으나 평행으로 놓인 것이 아니라 살짝 비틀게 놓여 있다. 그래서 북쪽의 처마는 닿을 듯하고 남쪽의 처마는 멀찍이 떨어져 있다. 이유인 즉, 겨울의 북풍이 좁은 데를 통과해 넓은 쪽으로 흘러 나가면서 순해지고, 남쪽에서 들어온 바람은 북쪽으로 빠져나가면서 속도가 빨라지니 곳간채의 음식 보관에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찬광은 북쪽에 두었다. 집을 흘러 지나는 바람까지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가 놀랍다.
역시 도시인들에게 있어 한옥은, 여름에 대청에 누워 스르르 잠들거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게으름의 즐거움을 누리는 게 최고의 맛이다. 그렇게 누워 눈만 끔벅이며 꿈틀꿈틀 유연하게 흘러가는 대들보를 바라보면 안다. 자로 잰 듯이도, 칼로 깎은 듯이도 살 필요 없다는 것을. 마음의 힘을 빼고 봄여름가을겨울에 맞게 숨 쉴 줄 아는 대들보를 올려다보며 하룻밤 잠을 청하면 안다. 아침에 일어나 흙처럼 순해진 몸과 마음을 보면 안다. 오늘부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재 윤증 고택 한옥 체험 문의 041-735-1215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전통 주거 지역으로 현재 약 수백 채의 한옥이 보존되어 있다. 계동, 가회동, 안국동, 삼청동 일대에 조성되어 있으며, 주변에 많은 사적들과 문화재, 고궁, 민속자료 등이 있어 도심 속의 거리박물관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붕을 잇대고 있는 여러 채의 한옥과 정다운 골목길이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북촌 한옥마을에서는 락고재, 우리집한옥체험관, 북촌한옥체험관 등에서 숙박할 수 있으며, 북촌 8경 등 도보 코스와 삼청공원, 경희궁공원 등 주변 볼거리도 많다.
문의 02-3707-8388, 02-3707-8578 / 홈페이지 http://bukchon.seoul.go.kr.

1998년, 서울 곳곳에 있던 전통 가옥 5동을 서울시 중구 필동 지역으로 이전해 복원해 놓은 전통 정원이다. 현재 이곳에는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철종의 사위 박영효의 가옥, 조선 후기 경복궁 중건 때 도편수를 맡았던 이승업이 1860년대에 지은 이승업 가옥, 조선 27대 순종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살았던 친가 등이 있어 선조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전통문화강좌, 공예품 판매, 민속놀이 재현 등 다양한 행사가 연중 펼쳐진다. 문의 02-2266-6923 / 홈페이지 www.visitseoul.net.

약 500년 전부터 부락이 형성되어 온 외암마을은 주민의 절반이 예안 이씨다. 중요 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가옥 주인의 관직명 등을 따서 참판댁, 참봉댁, 병사댁 등 택호를 갖고 있는 집이 많다. 다양한 농촌 체험과 더불어 기와와 초가 등 여러 한옥에서 숙박도 할 수 있다.
문의 041-541-0848 / 홈페이지 www.oeammaul.co.kr.

전주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형성된 전주 한옥마을에는 800여 채의 한옥이 들어서 있으며, 주변에 경기전, 오목대, 향교 등 중요 문화재가 자리잡고 있다. 전통 문화의 도시인 만큼 이곳에서는 독특한 체험을 할 수 있는데, 동락원에서는 전주 전통 비빔밥 만들기를, 황실후원회가 운영하는 승광재에서는 황실 문화 체험을, 양사재에서는 한지 공예 체험을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아세헌, 풍남헌 등에서 다양한 체험을 해 볼 수 있다.
문의 063-282-1330, 063-281-5044~6 / 홈페이지 http://hanok.jeonju.go.kr, http://www.hanokmaeul.com.

삼한시대부터 2,200년의 역사를 헤아리는 전통 마을로, 월출산의 서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 왕인 박사 유적지와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가 있으며, 매년 이 일대에서 왕인 벚꽃축제와 국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34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안용당, 월인당 등에서 숙박이 가능하며, 연중 도기 체험과 왕인촌 테마 체험이 진행된다. 문의 061-470-2656 / 홈페이지 ygurim.namdominbak.go.kr.

‘물이 돌아간다’는 뜻처럼 낙동강 줄기가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하회마을은 옛 양반 가옥들이 늘어서 있어 마을 곳곳이 마치 문화재와 같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방문했던 충효당을 비롯해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모습을 보여 주는 북촌댁, 보물 제 306호로 지정된 양진당 등 수많은 전통 한옥들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북촌댁과 하동 고택 등에서는 숙박도 할 수 있다. 문의 054-853-0109 / 홈페이지 www.hahoe.or.kr.

1500년대 이후 거창 신씨의 집성촌이 된 황산마을에는 100~200년 전에 지어진 50여 채의 한옥이 들어서 있다. 한 마을 전체가 모두 기와집으로 무리 지어 있어 독특한 풍경을 연출하는 황산마을은, 최근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1.2킬로미터의 돌담길이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약 10여 가구에서 고택 민박 체험을 할 수 있다. 문의 055-943-0003.

지난 4월, 전국 한옥에 대한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통 한옥체험 숙박 통합 홈페이지 ‘한옥에서의 하루’
(http://korean.visitkorea.or.krhanok)가 오픈되었다. 한옥의 지역별 특징, 숙박 정보 등 다양한 내용들을 볼 수 있다.







유서 깊은 한옥이 많은 성북동이지만 수연산방(壽硯山房)은 그 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고택이다. 가고 싶을 땐 언제든, 눈치 볼 것 없이 찾아갈 수 있는 찻집이기 때문이다. 하루 중 어느 시간에 가든 본채, 별채, 정자 구석구석 마련된 자리마다 찻잔을 앞에 놓고 여유로움을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찻집 수연산방의 가장 큰 매력은 모든 자리가 손님으로 꽉 차 있어도 흐트러지지 않는 고즈넉함이다. 이토록 운치 있는 집을 지은 이는 소설가 상허(尙虛) 이태준 선생이다.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집에 살던 1933년~1946년 당시 현대적인 구성과 세련된 문체로 사랑을 받던 작가였다. 그때만 해도 외딴 집이었던 수연산방에서 선생은 부인과 2남 4녀를 둔 가장으로 단란한 가정을 꾸렸고, 소설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썼다. 찻집으로 꾸몄지만 집안의 가구도 함부로 바꾸지 않은 덕에 주인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수연산방의 여유로움은 향기로 전해지는 옛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태준 선생이 즐겨 글을 썼다는 누마루에 앉아 뜰을 내다보면 이 집에서 행복했고, 충만했고, 평온했을 그가 느껴지는 듯하다.








한옥과 동사무소,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동사무소는 대부분 사람에게 가능하면 가고 싶지 않은, 간다 해도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은 공간이다. 주민등록등본을 떼고 전입 신고를 하는 번거로운 업무를 처리하러 동사무소를 찾은 사람들은 어서 일을 마치고 나가려고 조바심 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한옥에서 느껴지는 여유와 배려, 인간적이고 자연친화적인 향취 같은 것들이야말로 동사무소에 꼭 필요한 부분이다. 동사무소란 누구나 한 번쯤은 찾아가야 하는, 생활 가장 가까이 있는 관공서가 아닌가. 2006년 11월 한옥 청사로 옮기면서 혜화동사무소는 별일 없어도 찾아가고 싶고, 한 번 가면 오래 머무르고 싶은 공간이 됐다. 시멘트로 지은 견고한 건물과 달리 한옥은 잠시만 사람 손을 타지 않아도 금세 테가 난다. 한옥은 건축물이기 이전에, 주인은 정성을 다하고 손님은 스스럼없이 찾아와 편안히 머무는 사람의 공간인 까닭이다. 한옥 청사로 옮기고서 동사무소 직원들의 일은 자꾸 늘어난다. 멀리서, 가까이서 찾아오는 손님도 많아졌고 한옥을 관리하는 일도 만만찮다. 그런데도 직원들은 오히려 한옥 청사를 찾는 손님을 더 잘 대접할 궁리에 열심이다. 한옥을 사람의 공간으로 완성시키는 마음, 손님맞이를 소홀히 하지 않는 한옥의 주인답다

 


 | 부채는 벌레를 잡거나 더위를 이기기 위한 도구로 가장 유용했지만, 전통 혼례나 풍류를 위한 도구로도 사용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화폐를 대신할 만큼 값비싼 선물 역할도 했다.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을 가진 부채는 우리나라에서 기원전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더위가 시작될 무렵인 단오에 선물로 부채를 주고받기도 했다.
 | 왕골이나 골풀의 줄기를 이용해 만든 자리로, 왕골 자체에 염분 성분이 있기 때문에 땀 흡수력이 좋아 여름에 특히 시원하다. 새겨 넣는 무늬에 따라 용 문양을 새긴 것을 용문석이라 하고, 그 외에도 호문석과 난초석 등 많은 종류가 있다. ‘꽃무늬 돗자리’라는 뜻의 강화도 화문석이 그 중 특히 유명하다.
 | 대나무를 매끈하게 다듬어 둥글게 엮어 만든 피서용 취침 도구. 사람의 키만큼 길고 누워서 안고 자기에 알맞은 긴 원통형인 데다 속이 비어 있어 공기가 잘 통한다. 아버지가 안고 자던 죽부인은 어머니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는데, 감히 자식이 안고 잘 수 없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관 속에 합장하거나 불에 태웠다.
 | 주로 여름철에 창문이나 대청에 치는 용도로 사용되던 발은 삼국시대 이래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한옥이 점차 사라지면서 수요가 크게 줄었다. 전통 가옥인 한옥에서 발은 생활의 필수품이었는데, 여름철에 강한 햇볕을 막아 주어 시원함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밖에서 방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하는 기능도 갖고 있었다.


 | 등나무나 대나무를 저고리 소매처럼 만들어 팔목에 끼던 것이다. 통풍이 잘 되어 주로 남자들이 한여름에 많이 사용했다. 털이나 무명 등을 이용해 만든 겨울용도 있었다.
 | 말 그대로 ‘등과 등의 거리를 두고 입는 옷’이라는 뜻으로, 여름철에 삼베나 모시 안에 입었다. 등나무 덩굴을 가늘게 한 뒤 구부려 조끼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등에 걸치면 옷이 살에 닿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해 시원함을 느끼게 해 준다.
 | 옷감이 성글어 땀이 나도 몸에 잘 붙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해 여름 의복 재료로 널리 사랑 받았다. 생육 조건이 까다로운 모시에 비해 삼베는 원료인 삼이 우리나라에서 잘 자라 서민층에서 폭넓게 사용했다. 모시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

 



 | 집터 위에 돌로 층층이 쌓은 단을 말하며, 빗물이나 습기 등으로부터 집을 보호해 준다. 땅에 가깝게 집을 지으면 습기가 올라오는데, 이때 기단을 여러 겹 쌓아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주추를 놓으면 쾌적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단은 집안 구조물 사이의 엄격한 위계를 드러내는 장치로도 활용되었다.

 | 한옥에서 창은 채광과 통풍을 위한 것으로, 주로 살대에 창호지를 발라 사용한다. 창호지는 보온, 채광, 환기뿐만 아니라 집을 치장하는 장식적인 의미도 갖는다. 창문 아래를 받치는 예쁜 나무판을 ‘머름’이라 하는데, 머름은 문지방보다 높아 사람이 방에 앉아 편안하게 팔을 걸칠 수 있는 높이다.

 | 온돌과 함께 한옥의 특징으로 꼽히는 마루는, 방과 방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습기를 막고 통풍을 하는 등 쾌적한 여름철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높은 누대 위에 마루를 깔아 다락방처럼 만든 누마루, 지금의 거실처럼 안채 한가운데에 넓은 방처럼 꾸민 대청마루, 방이나 대청마루의 앞이나 뒤편에 덧대어 낸 툇마루 등이 있다.

 | 비나 눈으로부터 실내를 보호해 주는 기와지붕은 시각적으로 집의 절반을 차지하면서 집의 격식을 나타내기 때문에 장식적인 면이 특히 강조되었다. 비교적 간략한 맞배지붕부터 화려하고 위용이 있는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솟을지붕 등 종류가 다양한데, 일반 살림집에서는 맞배지붕이나 팔작지붕이 주로 쓰였다.

 | 바깥을 향한 지붕 아래의 공간으로, 본래의 역할은 빗물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뜨거운 햇볕을 가려 주는 등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처마는 집의 외관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도 하는데, 추녀와 함께 어우러진 처마의 날렵한 곡선은 옛 여인들의 버선코에 비유되며 특유의 곡선미를 선사한다.

 | 기둥은 주춧돌 위에 세우는 나무로, 한옥 공간 구성에서 기본이 된다. 기둥을 곧게 잘 세우려면 주춧돌과의 접합이 아주 중요하다. 기둥은 대개 정면에서는 곧게 보이지만 사실 완만하게 곡선을 이루거나 아래 위 너비가 다른데, 이는 원근감을 표현해 좀 더 안정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착시 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 목조 가옥인 한옥의 기둥을 맨 땅에 세울 수는 없는 일. 기둥이 썩지 않게 하면서 전체 구조물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주춧돌이다. 대개 주춧돌은 울퉁불퉁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돌을 깎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 된 기둥을 돌의 모양새대로 파내는 기술인 ‘글겅이질(그렝이질)’을 했기에 가능했다.

 | 비록 좁더라도 마당을 갖고 있지 않은 한옥은 찾기 어렵다. 살림집에서는 마당에 고추를 널어 말리거나 작물을 쌓아 두기도 했지만, 대개는 키 큰 나무 등을 심지 않고 그저 마당 그대로 비워 두는 경우가 많았다. 소담한 한옥에서 여유와 한가로움을 드러내는 소박한 공간이 바로 마당이기 때문이다.


 |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 옆에 붙어 있는 부엌에는 불을 때는 2~4개의 아궁이와 부뚜막이 있다. 지금의 싱크대와 비슷한 부뚜막에는 큰 가마솥을 걸어 두었고, 그릇들을 보관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선반인 ‘살강’도 있었다. 그러나 전통 한옥의 부엌은 작업 동선을 고려해 볼 때 지금의 부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불편한 구조였다.

 | 한국 고유의 난방 방식이자 한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온돌이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구들이 데워져 방바닥 전체에 열이 전달되는 방식이며, 고구려인들이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온돌’이라는 단어는 성균관의 온돌을 5간으로 늘렸다는 세종실록(1425년)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며, 18세기 즈음 전국적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1900년대 초 한국에 온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한국인들은 밤마다 펄펄 끓는 방바닥에서 빵처럼 구워지는 습관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