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적광전
봉녕사는 이제 수원의 도심에 놓이게 되었다. 경기도경찰청 바로 앞이어서 버스 정류장도 서로 공유한다. 수원 월드컵경기장과 경기도 중소기업센터 등 크고 높은 건물들이며 공사가 한창인 광교신도시가 주변을 형성한다. 경찰청 앞에서 버스를 내려 호젓한 산길을 조금만 거닐면 이내 일주문이 나타나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도로를 휘돌아 조금만 더 내려가면 봉녕사가 보인다.
불전사물이 걸린 종루를 지나 대적광전으로 가는 길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게 조성하였다. 잘 가꾼 나무와 잔디며 키 작은 꽃들을 무리지어 심은 꽃밭, 그리고 연못과 돌다리도 봉녕사에 들어가는 발길을 가볍게 만들어준다. 마치 부처님의 세계가 이렇듯 아름답고 청신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하다. 어느 고운 마음과 섬세한 손길이 만들었을까?
비구니 승가대학 봉녕사와 그 역사
봉녕사는 승가대학으로 유명하다. 그것도 비구니 승가대학으로서 150여 명의 학인스님들이 불교학 공부에 몰두하는 곳이다. 도서관인 소요삼장에는 2만여 권의 장서와 열람실, 시청각교육실을 두루 구비하였다. 절이면서도 승가대학교라는 두 가지 목표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셈이다. 또한 잡초 제거 등 단순 노동에는 스님들의 손길이 운력(運力)으로 모아진다. 그래서 화단이 단정하며 법당의 마루가 얼굴이 비쳐질 정도로 윤이 나는 것 같다.
봉녕사 뜰
봉녕사는 고려시대의 고승 원각국사가 창건하여 성창사라 하였고 1400년경 봉덕사로 이름을 고쳤다가 조선 예종 원년인 1469년 혜각국사가 중수하고 봉녕사라 하였다. 혜각국사는 세조로부터 스승예우를 받았으며 간경도감의 경전언해에 기여한 스님이다. 아마도 지금의 아주대학교 뒷산에 모신 혜령군-세종대왕의 이복동생-부부의 묘와 그 아들들인 예천군, 축산군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서 조포사(造泡寺-두부를 만들어 왕실의 묘 제사에 공급하는 절)로 삼았던 것 같다. 봉은사, 봉선사, 봉원사 등의 받들 봉(奉)자가 들어가는 절이 왕실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더구나 1469년이면 세종대왕의 영릉이 여주로 천장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후 봉녕사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1878년에 영산회상도, 칠성탱화, 현왕탱화가 조성된 것으로 보아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계속하여 1884년 약사여래 후불탱화, 1891년 신중탱화가 조성된 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19세기 말엽에 큰 불사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71년 비구니 묘전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봉녕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요사와 선원을 신축하고 봉녕선원을 개원하였으며 1974년 대웅전을 새로 짓는 등 사찰의 면모를 갖추어나간다. 1974년 비구니 묘엄스님(1931~)을 강사로 승가학원을 세웠고 1979년에는 묘엄스님이 주지와 학장을 겸임한다. 봉녕사는 수원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절이다. 그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 대적광전 앞마당에서 잘 자라나는 향나무이다. 수령이 무려 8백년이라니! 그 앞에 서기만 하면 괜스레 숙연해진다.
범종각
주지 겸 학장인 묘엄스님
묘엄스님은 봉녕사에서만 35년을 살아오신 분이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스님의 단 하나밖에 없는 비구니 제자이고 비구니로서는 드물게 봉암사 결사에 참여한 대선사이기도 하다. 그 아버지 역시 한국 불교계를 이끌었던 조계종 종정 청담스님(1902~1971)이셨다. 그 내공 탓이런가. 그는 수원의 불교계를 말없이 이끌어오고 지도해 오신 분이다.
고등학생 때인 30여 년 전 사춘기의 방황을 겪어내느라 힘들었을 때 우연히 봉녕사를 찾았다. 아무도 없는 봉녕사는 그야말로 ‘절간’이었는데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스님을 처음 뵈었다. 학교를 결석하고 온 것이 확연하였건만 스님은 그냥 빙그레 웃으셨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다음에 다시 갔을 때도 뵈었지만 또 그 미소만이 대답의 전부였다.
그 꾸짖지 않는 미소가 그리워서 그랬는지 또 찾아갔을 때 스님이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바람이 구름을 가르니 봉우리가 돋아난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라서 아, 네! 하고 돌아섰지만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바람이 구름을 가르니 봉우리가 돋아난다. 그 말씀을 곱새기고 또 새겨들은 다음부터 사춘기의 방황이 소멸되었음은 물론이다.
10여 년 전이다. 어떻게 인연이 되어 오랜만에 봉녕사를 찾았다. 벌써 그때는 큰절로 변하였고 대적광전을 짓는 등 불사가 한창이었다.
재무 소임을 맡아보던 스님의 인도로 묘엄 큰스님을 뵙고 절을 올리면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스님은 또 빙그레 웃으시다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고 말씀하셨다.
또 이 인연으로 종무소로 쓰는 건물의 여러 방에 현판을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 연화실, 실상실, 담소실 등 여섯 개의 작은 현판이지만 정성을 다했다.
나무는 대웅전에서 떼어낸 마루판으로 하고 전체 모습은 안상(眼象)처럼 가공하였다. 다만 글씨는 컴퓨터에서 뽑아서 썼는데 이점이 지금도 후회된다. 그래도 스님은 좋으셨는지 이후 대적광전 부처님의 복장유물을 맡아서 관장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큰일에 아무나 나설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완곡하게 거절하였더니 두고두고 섭섭해 하셨다고 전한다.
청담스님이 쓴 불경
몇 년 전의 일이다. 묘엄스님의 아버지 청담스님이 쓰신 불경을 접할 일이 생긴 것이다. 그 단정한 글씨를 보는 순간 숨이 멎을 듯한 느낌이었다.
일제강점기인 소화8년(1933)에 쓰고 책으로 엮은 것인데 도장 끝에는 한글로 ‘소멸’이라고 새겨져서 나의 ‘사춘기소멸’을 생각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묘엄스님의 그 미소와는 격이 다르다.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봉녕사에서는 한국사찰음식축제가 열린다. 사찰음식 종가로서도 봉녕사가 명실상부하게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염상균 / (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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