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인연으로 내 손에 들어온 물건, 새 것에 눈 간다고 쉽게 내다버릴 수 있나요. 살 때보다 버릴 때 한번 더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씨와 여성잡지 프리미엄 여성중앙이 ‘명사와 함께-효재의 지구를 살리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이효재씨가 명사를 초대해 일상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환경 운동 방법과 친환경적인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다. 두 번째 손님은 전 교육부 장관이자 현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인 문용린씨다.
3년 전, 성당에서 치러진 딸의 결혼식에서 문 교수는 하객들에게 백설기와 녹차설기를 선물하려고 마음먹었다. 이때 이효재씨는 버리고 마는 포장지 대신 색실로 한 땀 한 땀 꽃을 수놓은 고운 행주로 떡을 싸도록 도왔다.
“아직도 제 딸은 그때의 포장 행주를 얘기해요. 종이 타월이나 물휴지를 많이 쓰는 요즘 같은 때, 선물로 받은 광목 행주를 부엌 한편에 두고 살 수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죠.”
문용린 교수는 옛것 예찬론자다. 한번 손에 들어온 익숙해진 것들은 잃어버리지 않는 이상 잘 바꾸지 않는 것이 그의 오래된 철칙이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면 으레 가질 법한 습관이죠. 어려서부터 늘 ‘아껴야 한다’고 배웠으니까요. 깊은 인연으로 내 손에 들어온 물건들인데 새로운 것에 눈 간다고 쉽게 내다버릴 수 있나요. 내 손에서 떠나면 용도를 잃고 폐기 처분될 게 뻔한데.”
언제나 그의 재킷 주머니 한구석을 차지하는 만년필은 올해로 서른 살이 됐다. 허리춤의 벨트 역시 끝이 해어진 지 오래지만 아직도 문 교수에겐 단 하나뿐인 벨트다.
“옛날 어른들은 쓰고 난 하수를 버릴 때도 더운 물은 식혀서 버렸죠. 뜨거운 물을 그냥 버리면 흙 속의 미생물이 죽어서 자연을 해칠 수 있으니까요. 이처럼 뭔가를 살 때보다 버릴 때 고민을 한 번씩 더 했으면 좋겠어요.”
“뭐든 아끼는 독일사람들에 놀라”
문 교수가 ‘잘 버리는 일’에 충격을 받은 것은 지난해 독일 도르트문트시에 갔을 때였다. 독일은 음식점에서도 생수를 무료로 제공하지 않는다. ‘물 값’을 따로 받는다는 걸 몰랐던 문 교수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생수 3병을 시켜 먹었다. 그런데 함께 식사한 독일 친구는 생수 한 병을 몇 차례에 걸쳐 나눠 먹는 것 아닌가.
“독일에선 물도 돈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물 한 병으로 식사 후 입을 가실 때까지 양을 계산해서 나눠 먹는 게 자연스럽게 몸에 밴 거죠. 조금 부족하다 싶으면 무조건 또 사고, 남기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달리 버리는 것이 없도록 계획적으로 생활하는 모습에 가슴이 쿵 울리더군요.”
문용린 교수가 ‘오래 쓰기’의 일인자라면, 이효재씨는 알려진 대로 헌것을 새것으로 ‘고쳐 쓰는’ 미다스의 손을 가졌다. 얼핏 문 교수와는 방법이 달라 보이지만 이효재씨의 ‘고쳐 쓰기’ 습관도 결국 익숙한 것을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촌스러운 디자인의 욕실 슬리퍼에 레이스와 꽃을 달고, 자투리 실을 모아 뜨개질한 컵 받침에는 먹다 남긴 와인 물을 들이고, 못 입는 스웨터는 팔 부분만 잘라 목도리로 사용하는 그녀의 솜씨는 늘 문 교수를 감동시킨다.
이효재씨도 문 교수의 철학에 존경을 표한다.
“문 교수님은 제가 생각을 더 넓게 확장하는 데 영향을 준 분이죠. 30년 경력의 교육학자답게 늘 다음 세대를 생각하거든요. 친환경도 우리 세대의 실천으로만 끝날 게 아니라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으로 연결시킬 수 있도록 방법들을 고민하죠.”
문용린 교수가 제안하는 친환경 교육은 ‘말’로만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다.
“젊은 세대에게 무조건 쓰지 말고 아끼라고만 하면 어디 듣겠습니까. 필요한 것은 사서 써야죠. 대신 한번 산 것을 오래 쓰라고 가르쳐야죠. 사람이 귀하듯 물건도 귀한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러려면 우선 어른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틀과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죠.”
“재활용 동참 이끌 시스템도 필요”
독일의 길거리에선 버려진 페트병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식당·백화점·마트 등 큰 건물 앞에 페트병 수거기가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빈 페트병을 집어넣으면 돈이 나오는 기계다. “국가 차원에서 ‘빈 페트병은 돈이고, 따로 수거해야 한다’는 인식을 국민이 가질 수 있도록 시스템화한 것이죠. 우리도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자’ 정도의 의식 교육만으로는 부족해요.”
문 교수는 평소 ‘세대의 숙제(Generation Mission)’라는 말을 자주 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앞 세대가 뒤 세대에게 숙제를 만들어주는 것을 말한다.
“가령 초등학교 4학년은 주변의 다 쓴 배터리를 모으는 학년, 5학년은 페트병을 모으는 학년 등 환경을 위해 스스로 동참할 수 있도록 실천과제를 제시해 주자는 거죠.”
지구를 살리는 일은 특정 세대, 특정 시기에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앞 세대가 자연스럽게 뒤 세대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일. 이것이 문용린 교수의 ‘지속가능한 지구 만들기’의 청사진이다.
글=강민경 프리미엄 여성중앙 기자
사진=문덕관 studio lamp
연잎에 담아낸 녹차, 와인으로 물들인 찻잔 받침…
이날 이효재씨는 문용린 교수에게 비빔국수를 대접했다. 저녁때를 앞둔 다섯 시쯤이라 출출하기도 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국수”라며 문 교수는 한 그릇을 가볍게 비웠다. “나는 하루 세 끼를 국수만 먹으라고 해도 마다하지 않아요. 하하.” 마당 장독 항아리에서 퍼낸 고추장으로 맛깔스럽게 비빈 국수는 매웠다. “여름철에는 매운맛이 식욕을 돋우고 입안을 개운하게 하죠.” 이효재씨는 입안의 매운 기를 달랠 수 있도록 커다란 연잎에 진한 녹차를 담아냈다. “녹차가 연녹색 이파리와 어울리니 황금빛을 띠는군요.” 문 교수는 이 색다른 상차림을 아이처럼 신기해했다.
처음 찻잔을 받쳐 내왔을 때만 해도 색실로 짠 평범한 손뜨개 받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색깔의 진하기가 조금씩 달랐다. 천연염색을 한 것이다. 그것도 손님들이 먹다 남기고 간 와인으로 물들인 것이다. “남은 와인이 아까워 어찌할까 고민하다 하얀 색 받침에 와인 얼룩이 진 것을 보고 아예 자줏빛을 만들자 생각했죠.” 하룻밤 와인 잔에 담갔다 아침 햇볕에 널어 말리면 모든 과정은 끝난다. “이렇게 천연염색을 하면 시간이 갈수록 색이 바라면서 또 다른 멋을 내죠. 그것이 싫으면 또 한번 담그면 돼요.” 오른쪽의 검정색은 서리태 삶은 물을 이용한 것이다.
여름 햇볕보다 무서운 게 가을볕이라는 말이 있다. 한여름부터 가을까지 양산 하나 장만해 두면 얼굴이 검게 그을리는 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사진 속 우산은 처음에는 밋밋했다. 하지만 촘촘히 레이스를 뜨고 하트 장식까지 다니까 이렇게 사랑스럽게 변신했다. 이처럼 이효재씨에게는 헌것을 고쳐 쓰고, 평범했던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하나 가져가면 안 되겠느냐”며 만드는 방법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이효재씨는 재활용품 꾸미기 아이디어들을 모아 『효재처럼 손으로』라는 책을 만들었다. 9월 출판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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