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이르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은평향토사학회 문화유적 답사지에서
안성 청룡사는 우리나라 남사당문화를 발원시킨 사찰인 점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모르고지나치기 쉽다. 말하자면 청룡사와 남사당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23세의 나이에 요절한 남사당패의 최고 스타였던 여자 꼭두쇠(남사당패 대장) 바우덕이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우리는 알아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청룡사는 우리나라 전통문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구불구불 휘어진 자연목
절마당에 있는 고목
바우덕이는 안성 청룡사 옆 골짜기인 불당골에서 지냈다고 한다. 혹은 청룡사에서 숙식했다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안성 청룡 바우덕이’로 시작하는 바우덕이 속요에도 나와 있지만 바우덕이와 안성 청룡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당시 전국의 사찰들은 재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청룡사에서는 사당패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고 바우덕이패는 공연을 하면서 먹거리며 현금을 조달해 주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호 공생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우덕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성 청룡사를 꼭 찾아보아야 한다. 청룡사는 큰 사찰은 아니지만 매우 아름다운 대웅전으로 유명하다. 청룡사 대웅전은 아름다움 자체만으로도 꼭 찾아보아야 할 가치가 있다. 사방 기둥을 모두 구불구불 휘어진 자연목으로 사용했는데 그 균형미와 굴곡의 아름다움이 보는 이의 눈을 붙잡는 건축물이다. 자연미 넘치는 건축계획과 치밀한 배치작업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대웅전은 축대며 모든 것이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해서 서로 잘 어울린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바우덕이의 민중 연예예술의 극치와 청룡사 대웅전의 자연적이며 서민적인 아름다움은 상호 비교되며 연관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바우덕이사당으로가기전 부도
바우덕이는 평소 바우덕이를 흠모하던 30세 연상의 남자에게서 지극한 간호를 받았지만 결국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였다. 바우덕이를 간호하던 기둥서방은 바우덕이의 죽음을 슬퍼하여 물가 바위 위에 않아 십수일을 울었다고 한다. 이 때의 그 발자국이 바위에 새겨져서 남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울음바위라고 불렀다. 소리도 팔고, 치맛속 흰 살도 팔고, 때로는 양반네에게 몸도 팔았지만 한 번도 사당패를 떠나지 않고 대중예술을 이끌며 가족을 부양했던 바우덕이의 연예와 슬픔과 파란만장한 삶은 지금도 전설로, 실화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처럼 떠나를 가네
사당앞에 있는 개망초
남사당패의 전설적인 인물 ‘바우덕이동상
바우덕이의 이름은 김암덕(金岩德, 1848~1870)이었다.
한문이름을 풀어 ‘바우덕이’라고 불렀다
날렵한 몸에서 우러나오는 기예는 어떤 사내아이들을 능가했답니다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그토록 기예에 뛰어난 바우덕이는
꽃다운 나이 23살에 폐병을 얻어 요절하고 말았다
10여 년 전부터는 안성시가 매년 10월초에 바우덕이의 뜻을 기리는
‘ 바우덕이 축제’도 성대하게 개최하고 있다.
바우덕이 사당 구경하고
절에서 조금내려오니 두부를 파는 할머니가 계셔서 두부와 막거리로 목을 추기고
저녁은 오징어회와 매운탕으로
노을
함께 동행한 남편친구 아내와함께
토요일 한나절 안성에서 보내고 왔습니다
'$cont.escTitle > 물안개 사는 이야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제 손님 대접은 (0) | 2009.07.03 |
---|---|
나도 황안나 여사처럼 (0) | 2009.07.02 |
너무 예쁜 창문들~~~ 하나 같고싶어요 (0) | 2009.06.26 |
손바느질을 해보니 (0) | 2009.06.26 |
장례식에 다녀오면서 간 헤이리 예술인 마을 (0) | 2009.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