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곡밥과 나물의 조화, 정월대보름 이야기
설날과 추석이 되면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바로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고속도로 교통량만 살펴봐도 이 때 전국을 오가는 차량의 숫자는 평소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올해 설날 당일에는 총 485만 대가, 지난해 추석 당일에는 516만 대가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매년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교통량 최대치를 경신한다.
조선시대에는 설날, 추석 이외에 한식과 단오를 넣어서 ‘4대 명절’로 꼽았다. 그러나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대부분의 세시풍속이 사라졌다. 조상의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벌초를 하던 한식도,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던 단오도 사라졌다. 그러나 고향을 찾아가 가족들을 만나는 기회를 주는 설날과 추석 이외에 또 하나의 명절이 살아남아서 전통적인 풍습을 지키게 해준다. ‘정월대보름’이다.
음력은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달력이다. 달은 29.5일을 기준으로 차고 기울면서 모습이 변한다. 음력에서는 달이 기울어 전혀 보이지 않는 날을 ‘초하루’ 즉 1일로 정한다. 완전히 둥근 모습으로 빛나는 15일은 ‘보름날’이라 부르며 다시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을 한 달의 마지막인 ‘그믐날’이라 한다. 정월 대보름은 정월에 맞이하는 보름날, 즉 음력 1월 15일이며 1년 중 가장 중요한 대보름날이다.
둥글게 가득 찬 보름달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다. 정월 대보름은 새로운 해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보름날이니 특별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이날 전국 곳곳에서는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며 갖가지 민속놀이와 풍속을 즐긴다. 대표적인 것이 마을 제사 지내기, 달맞이 소원 빌기, 더위 팔기, 다리 밟기, 액막이 연 날리기, 달집 태우기, 쥐불놀이, 줄다리기 등이다.
독특한 음식도 빠질 수 없다. 정월 대보름에는 다섯 가지 곡식으로 오곡밥을 지어먹고 열 가지 나물로 반찬을 만들며 단단한 견과류를 입에 넣고 부럼 깨물기를 한다. 차가운 술을 남녀노소가 함께 마시는 귀밝이술, 솔잎을 깔고 떡을 쪄먹는 솔떡도 대보름 음식이다.
오곡밥은 지역마다, 계층마다 서로 다른 재료를 사용했다. 충청도와 경기도에서는 찹쌀, 팥, 콩, 차조, 수수를 넣었고 다른 곳에서는 멥쌀이나 보리쌀로 대체하기도 했다. 민간에서는 곡식만 넣었지만 재력이 있는 집에서는 밤, 대추, 곶감, 꿀을 넣기도 했다. 여기에 간장을 넣어 색깔만 입히면 곧바로 약밥이 된다. 두 음식은 찹쌀을 쓰고 색깔이 거무스름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대보름날에 이처럼 어두운 색의 밥을 지어먹는 이유는 까마귀의 전설 때문이다. 고려시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는 비처왕 또는 소지왕이라 불린 신라 21대 왕이 까마귀를 따라갔다가 연못 속에서 나타난 신령한 사람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전해주는 편지를 열어보니 “가야금을 담아두는 상자를 활로 쏘라”고만 돼 있었다. 궁궐로 돌아온 왕은 가야금 상자에 화살을 쏘았고 그 안에서 몰래 바람을 피우던 왕비와 중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결국 두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고 왕은 까마귀를 만난 음력 1월 15일이 되면 거뭇거뭇한 찰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에게 행동을 조심히 하라고 명했다.
오곡밥이나 약밥 같은 찰밥을 짓는 이유는 전설이 아닌 생활에서도 힌트를 찾아볼 수 있다. 평소 자주 먹지 못하는 음식을 지어 바침으로써 의례에 엄중함을 더하고 행사 후에는 다 같이 나눠먹어 그동안 부족했던 영양분을 정기적으로 보충하는 것이다.
여러 곡식이 어우러진 오곡밥은 영양면에서도 뛰어난 음식이다. 팥은 칼륨이 풍부해 붓기를 빼고 노폐물을 배출하는 효과가 있다. 콩은 비타민과 철분뿐만 아니라 이소플라본이라는 단백질이 풍부한데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비슷한 구조로 돼 있어 유사한 작용을 한다. 우울증, 골다공증, 갱년기 증상을 완화시켜주고 심장병과 고혈압의 위험을 낮춘다. 차조는 이뇨작용으로 소변 배출을 돕고 쌀로는 채우지 못하는 무기질을 제공한다. 수수는 프로안토시아니딘이 많아 방광의 면역기능을 높이고 타닌과 페놀이 항산화 작용을 일으킨다. 찹쌀은 소화기관의 부담을 줄여서 노약자가 음식을 섭취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오곡밥과 함께 먹는 나물반찬도 건강에 좋은 음식이다. 정조 때 홍석모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설명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박, 버섯, 콩, 순무, 무잎, 오이꼭지, 가지껍질과 같은 각종 채소를 말려둔 것을 진채(陣菜) 즉 ‘묵은 나물’이라 하며, 정월 대보름에 삶아서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설명해 놓았다. 지역에 따라 나물의 종류가 달라지지만 보통 9가지 또는 10가지의 나물을 준비한다. 취나물, 고추나물, 삿갓나물과 같은 산에서 채취하는 나물뿐만 아니라 시래기, 무청, 호박잎 등 채소를 말린 것도 쓴다. 묵은 나물은 아니지만 콩나물과 숙주나물을 포함시키기도 하며 바닷가에서는 해초를 함께 섞기도 한다.
음식이 충분치 않은 한겨울에 먹는 ‘진채식’은 평소 저장음식을 부지런히 마련해두는 바람직한 생활습관을 유지하고 점검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겨우내 부족했던 식이섬유와 무기질을 섭취함으로써 새로운 기운을 얻기 위한 새해맞이 행사용 음식으로 적합하다.
대보름날 아침에는 부럼을 깨문다. 동국세시기에는 “날밤, 호두, 은행, 잣, 무를 깨물면서 일 년 동안 아무 탈 없이 평안하고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며 이를 튼튼히 하려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구절이 있다. 부럼 깨물기는 한자로 ‘작절(嚼癤)’이라 하는데 ‘부스럼을 깨문다’는 뜻이다. 부스럼은 종기를 비롯한 피부질환을 가리킨다. 부럼으로 쓰이는 견과류에 풍부한 불포화지방산이 피부에 영양을 공급하기 때문에 생겨난 풍습이다. 또한 견과류를 깨무는 것은 소홀히 하기 쉬운 치아 건강을 점검하는 효과가 있다.
정월 대보름에 먹는 음식에는 천 년 넘게 내려오는 전통과 이야기뿐만 아니라 농업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풍습 그리고 건강을 점검하고 영양을 보충하기 위한 생활의 지혜가 모두 담겨 있다. 버려야 할 옛날의 풍습이 아니라 현대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다. 올해 2015년의 정월 대보름은 3월 5일이다. 오곡밥, 나물반찬, 부럼 등 전통적으로 즐겨왔던 음식을 만들어 온가족이 함께 나눠먹고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자리를 만들어보는 게 어떨까.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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