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문희 기자 “후추는 태양처럼 뜨겁고 후끈하지. 소금은 없어서는 안 될 인생의 소스와 같단다.” 그리스 영화 ‘터치 오브 스파이스’(2003)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향신료 가게를 운영하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향신료를 통해 우주의 섭리와 인간사에 대해 알려줍니다. 우리가 몰랐던 향신료의 역사에 대해 더 알아보겠습니다. 『셰프가 추천하는 54가지 향신료 수첩』(우듬지), 『향신료 이야기』(살림)를 참고했습니다.
위문희 기자
향신료는 식물의 꽃·잎·씨앗·줄기·뿌리·껍질 등에서 얻는데 채취 시기와 가공 방법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우리가 아는 향신료는 고추·마늘·생강·겨자·후추 등에 불과하지만 세계적으로 향신료의 종류는 수십여 가지에 이른다. 어떤 향신료를 더하고 빼는지에 따라 그 나라 요리의 특색이 결정되기도 한다.
백화점 식품관이나 외국인 거주지 근처 수퍼마켓에서 손쉽게 향신료를 구할 수 있다. 50여 가지의 향신료를 2000원대부터 최대 1만원대 가격으로 선보이는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식품관. [사진 신세계백화점]
① 후추(Pepper), 향신료의 왕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향신료다. 인도에서 처음 쓰인 후추는 기원전 6세기 유럽에 소개됐다. 인도의 말라바르 해안에서 생산하는 후추가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후추처럼 비싼(cher comme poivre)’이라는 프랑스의 관용적 표현에서 보듯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너무 비싸 화폐처럼 세금이나 벌금을 낼 때 또는 결혼 지참금으로 쓰이기도 했다. 후추덩굴에서 꽃이 떨어지고 나면 녹색 다발의 후추 열매들이 열린다. 열매의 익은 정도와 따서 말리는 방법에 따라 검은색·흰색·초록색 후추가 탄생한다. 후추는 짜릿한 매운맛과 상큼하면서 자극적인 향이 특징이다. 후추의 상쾌한 향미는 고기 누린내와 생선 비린내를 없애는 데 효과적이다. 매운맛이 강한 검은 후추는 스테이크나 샐러드를 만들 때 들어가고 상대적으로 순한 맛이 나는 흰 후추는 생선 요리에 들어간다. 살균효과가 있어 햄·소시지 같은 가공식품에도 사용된다.
② 월계수(Sweet Bay), 향신료의 어머니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다. 고대 그리스에서 월계수 잎이 달린 가지로 월계관을 만들어 아폴로 신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다. 월계수는 잎만 식용이 가능하다. 잎을 제외한 부분은 독 성분이 있다. 말린 잎은 ‘베이 리프(bay leaf)’로 불린다. 양식에서 육수를 내거나 소스를 만들 때 대부분 들어가기 때문에 ‘향신료의 어머니’로 불린다. 월계수 잎은 달면서 쓴맛이 나는데 수프나 스튜요리에 넣으면 매운 향이 난다. 생선을 데치는 물에 넣어도 좋다. 최근엔 월계수 잎이 가진 특유의 쓴맛 때문에 구아바 잎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월계수는 관절염이나 신경통에도 진통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말린 잎 2~3g에 300㏄의 물을 붓고 끓인다. 물의 양이 3분의 1 정도 남았을 때 마시면 된다.
③ 샤프란(Saffron), 향신료의 여왕 최근까지도 무게당 가격이 금과 대등하게 매겨졌다. 한 개의 구근에서 2~3송이 꽃이 피는데 각 꽃 속에 있는 빨간 암술을 따서 말려야 샤프란이 된다. 이때 1g의 샤프란을 얻기 위해서는 200~500개의 암술을 말려야 한다. 150개 이상의 구근을 채취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모든 작업이 사람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인건비가 가중되어 금값만큼 비싸지는 것이다. 말린 샤프란은 검은 금빛 오렌지색이다. 물에 풀면 노란색이 된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왕실 의상을 황금색으로 염색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샤프란이라는 이름 자체가 아랍어로 노란색을 뜻하는 ‘zahafaran’에서 유래했다. 값이 매우 비싸 고급 요리의 향신료로만 쓰였다. 노란색을 내는 천연 색소로는 치자가 유명하지만 치자는 많이 쓰면 쓴맛이 난다. 반면 샤프란은 양에 관계없이 은은하게 쓴맛이 난다. 스페인에선 샤프란 소스를 넣어 노란색 해산물 쌀밥인 ‘파에야’를 먹는다. 이탈리아의 밀라노 스타일 리조토에도 샤프란이 들어간다.
④ 고수(Coriander), 중국 파슬리 고수는 고대 로마인이 중동에서 들여온 뒤 주로 육류의 저장을 위해 이용됐다. 현재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요리에서 많이 사용한다. 우리나라 파처럼 샐러드·튀김·쌀국수 등의 요리에 들어간다. 고수 잎이 파슬리와 비슷하게 생겨서 ‘중국 파슬리’로 불리기도 한다. 고수는 모든 부분을 요리에 사용할 수 있다. 잎은 얼얼한 향이 있고 씨를 말리면 매운 감귤 향이 난다. 동양에서는 잎을 주로 사용하고 서양에서는 씨앗을 쓴다. 소시지나 고기를 굽기 전에 곱게 간 고수 씨를 발라 향을 가미하기도 한다. 고수 잎은 요리가 끝날 때 첨가한다. 어린 잎 채로 샐러드에 넣기도 하고 다져서 샐러드 드레싱을 만들 때 사용하기도 한다. 의학적으로 고수 잎을 씹거나 차에 넣어 마시면 소화를 촉진한다고 알려져 있다. 위장과 복부의 통증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중국에서는 만병통치약 또는 불로장생약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⑤ 정향(Clove), 꽃봉오리로 만든 향신료 유일하게 꽃봉오리를 쓰는 향신료다. 원산지는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지만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와 탄자니아 등에서도 재배된다. 세계 최대의 정향 생산지는 탄자니아의 잔지바르섬이다. 정향나무에 노란 꽃이 피기 전 장밋빛의 봉오리 상태로 따버린다. 꽃이 피면 향기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 꽃봉오리를 말리면 진한 갈색이 되는데 이것이 정향이다. 상쾌하면서 달콤한 향이 나는데 향신료 중에서 맛과 향이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정향을 육류 요리에 사용하면 누린내를 제거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햄에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칼집을 내고 중간 중간에 정향을 끼워 넣는 것이다. 그 위에 겨자·설탕을 뿌려 오븐에 구우면 향과 맛이 좋은 햄 요리가 된다. 향이 강하기 때문에 포푸리의 재료로도 쓰였다. 오렌지에 정향을 찔러 넣어 방에 매달아 두면 된다.
⑥ 계피(Cinnamon), 세계 3대 향신료 중 하나 계피는 후추·정향과 함께 세계 3대 향신료로 꼽힌다. 고대 로마에서 황제와 몇몇 귀족 계급의 전용 향신료였다. 로마 네로 황제가 그의 애첩 사비나가 죽었을 때 계피 1년치 분량을 태워 애도했다고 전해진다. 계피를 태울 때 피어오르는 향기 때문이었다. 서양에서 사용하는 계피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계피는 종류가 다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계피는 계수나무 껍질이고, 서양에선 육계나무의 껍질을 가리킨다. 육계는 실론섬, 즉 스리랑카산 육계를 가장 질 좋은 것으로 여긴다. 계피와 육계 모두 상쾌하면서 달짝지근한 맛이 난다. 하지만 계피는 매콤한 향이 좀 더 강해 한약재로 쓰였다. 약과 같은 한과나 수정과를 만드는 데도 쓰인다. 단맛이 강한 육계는 서양에서 케이크나 디저트를 만들 때 또는 커피나 코코아와 같은 뜨거운 음료에 들어갔다.
⑦ 펜넬(Fennel), 수산물 요리와 최고의 궁합 로마 시대에는 펜넬을 끓인 물로 갓난 아이의 눈을 씻어 주는 관습이 있었다. 시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눈에 염증이 생기면 펜넬을 넣고 끓인 물을 세안액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요리에서 펜넬은 생선요리의 비린내를 제거하고 기름기를 중화시키는 데 사용된다. 잎을 잘게 다져 신선한 생선요리에 넣으면 된다. 동양에서는 ‘회향’으로 불렸다. 요리에 넣으면 본래 향미를 회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도에서는 식사 후 입가심으로 펜넬을 내놓기도 했다. 중국의 혼합 향신료인 ‘오향’의 재료이기도 하다. 오향은 산초·계피·정향·회향·팔각으로 만든다. 펜넬은 신장과 방광을 따뜻하게 해주므로 신장염이나 신부전증을 치료하는 데도 쓰인다.
⑧ 커민(Cumin), 중동의 가장 중요한 향신료 고대 로마인들은 후추처럼 커민을 육류에 뿌려 먹었다. 수확한 열매를 말려 통째로 쓰거나 가루로 갈아서 쓴다. 중세 유럽에선 고가의 향신료를 쓸 수 없었던 하층계급이 사용했다. 현재는 아랍 요리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향신료다. 원산지가 이집트 나일강가다. 주로 양고기나 닭고기 요리에 들어간다. 강한 향과 톡 쏘는 매운 맛이 지배적인데 타는 듯이 매운 맛을 내는 ‘구미날’이라는 성분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아랍 요리 특유의 강한 향을 풍기게 하는 향신료다. 인도의 카레와 탄두리 치킨에도 들어간다. 의학적으로 커민은 소화를 촉진하고 복통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여겨진다.
⑨ 강황(Turmeric), 인도의 샤프란 인도·인도네시아가 원산지로 가루 색깔이 밝은 노란색이어서 ‘인도의 샤프란’으로 불렸다. 뿌리 줄기를 삶아서 말린 후 껍질을 벗기면서 가루로 만든다. 실제 샤프란이 고가여서 샤프란 대용으로 애용되기도 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노란색을 신비로운 색깔로 여겨 강황 가루를 제사에 사용하곤 했다. 승려의 옷을 금빛으로 물들이는데도 사용했다. 인도에서 강황은 카레와 혼합 향신료인 ‘가람마살라’의 주 재료다. 강황은 ‘울금’이라 불리며 한방에서 한약재로 쓰이기도 했다. 주로 지혈제로 처방했다. 코피 등의 증상이 있을 때 달여 먹었다. 이 외에도 진통 효과가 있어 담석증·황달을 치료하는데 쓰이기도 했다.
[사진 ㈜우듬지·중앙포토]